有樂町で逢いましょう-フランク永井///歌の後にからめる色々な話し(D)|★....演歌 게시판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フランク永井 作詞 佐伯孝夫 作曲 吉田正
一 あなたを待てば 雨が降る 濡れて来ぬかと 気にかかる ああ ビルのほとりのティー・ルーム 雨も愛(いと)しや 唄ってる 甘いブルース あなたと私の合言葉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
二 心に沁みる 雨の唄 駅のホームも 濡れたろう ああ 小窓にけむるデパートよ 今日の映画(シネマ)はロードショウ かわす囁き あなたと私の合言葉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
三 悲しい宵は 悲しいよに 燃えるやさしい 街灯り ああ 命をかけた恋の花 咲いておくれよ いつまでも いついつ迄も あなたと私の合言葉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
歌の後にからめる色々な話し 作曲者 吉田正은 作詞者 佐伯孝夫와 함께 만든 作品이 대단히 많습니다. 特히 1950年代 前半에는 두 사람이 独特한 都会的 무드를 가진 히트 曲을 連発하였는데 1956年에 “東京の人””哀愁の街に霧が降る”1957年에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東京午前三時”1958年에 “西銀座駅前” 1959年에”東京ナイトクラブ”等이 그 例입니다.
이때 시골의 많은 靑少年들은 이 노래로 大都会・東京을 憧憬하게 되었으며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가 發賣되었을 때에는 많은 젊은이 들이 Redio에서 흘러나오는 フランク永井의 속삭이는 듯한 低音의 노래에 都会 生活이란 이런 것인가 라고 하며 感動하였다고 합니다.
都市의 젊은 男子들은 近處 빌딩 茶房에서 달콤한 부르스와 같은 빗소리를 들으며 女性과 만날 約束을 하거나 百貨店에 가거나 映畵를 보고나 하는 들뜬 生活에 부풀어 있었다고 하며 茶집 조차 가본 일이 없는 시골 靑年들 Tea Room이 어떤 곳인가도 잘 모르고 都會地의 비는 시골의 비와는 전혀 다른 것인가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의 첫머리의 한 文章을 서툴게 비꼬면 “田舎の生活は皆同じように似ているが、都会の生活は、人や家庭により、そのありようを異にしているものだ=시골의 생활은 모두 같이 닮아 있지만, 도회의 생활은, 사람이나 가정에 의해, 그 실태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 온 셈입니다.
フランク永井(本名:永井清人)는 宮城県 出身으로 歌手를 目標로 上京하여 트럭運転手 等을 하며 進駐軍(美軍) 클럽에서 재스를 부르고 있는 동안 作曲家 吉田正의 눈에 띄어 歌謡曲으로 転向 이 노래를 받은 德分에 一躍 스타 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実은 傳統 있는 百貨店의 顧客誘致 캠페인으로부터 생긴 것이랍니다.
大阪에 本社를 두고 있던 百貨店“そごう”가 東京으로 進出하려는 곳이 有楽町이 였습니다. 그러나 当時의 有楽町는 여기 저기 불탄 자리로 暗市場만이 있을 뿐 百貨店 자리로는 不足한 자리 였습니다.
거기에서 同社의 宣伝部를 이끌고 있던 豊原英典이 構想한 것이 “有楽町 高級化 캠페인”입니다. 그는 美國映畵 “라스베가스에서 만납시다” 에서 힌트를 얻어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라는 케치프레이스를 생각해 냈습니다.
서 들러 그는 開局 後 4年 째를 맞아 日本TV를 움직여 同社 提供의 歌謡프로그램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를 出發시켰습니다.
目標는 거침없이 들어맞아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는 瞬息間에 流行語가 되고 德分에 百貨店 開店의 1957年(昭和32年)5月25日에는 비가 오는데도 不拘하고 約30万 名이 들어 닥쳐 큰 騒動으로 이여 졌습니다.
이 大成功을 메스콤이 모르는 체 할 일이 없지요 于先 平凡出版이 芸能誌”平凡”에 小説”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宮崎博史 作)을 連載하고 그것을 大映에서 “京マチ子”菅原謙二””川口浩””野添ひとみ”等 올스타를 캐스트로 映画를 企画하고 그 主題歌로 Victor가 佐伯孝夫・吉田正에 依頼하여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를 만들어 그 모두가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企業의 캠페인으로서는 商業宣伝史上 보기 드문 大成功이었다 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栄枯盛衰의 世習이나 経営陣의 企業私物化 等에 依해 “そごう”는 倒産하고 2000年9月24日 フランク永井의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의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閉店세일을 行하여 東京 店은 44年間의 歴史의 幕을 내렸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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