城ヶ島の雨-美空ひばり 作詞 北原白秋 作曲 梁田 貞 原唱 奥田良三
雨はふるふる 城ヶ島の磯に 利休鼠の 雨がふる 雨は真珠か 夜明けの霧か それともわたしの 忍び泣き
舟はゆくゆく 通り矢のはなを 濡れて帆上げた ぬしの舟 ええ 舟は櫓(ろ)でやる 櫓は唄でやる 唄は船頭さんの 心意気
雨はふるふる 日はうす曇る 舟はゆくゆく 帆がかすむ
歌の背景 이 詩는 島村抱月 主宰의 劇団 芸術座의 依頼를 받아, 1913年(大正2年)에 作詞한 것입니다.当時 東京府立 第一中学校(現 都立 日比谷高校)의 音楽教師였던 梁田貞(やなだてい)가 曲을 붙여 同年 10月 30日에 東京 数寄屋橋의 有楽座에서 열린「芸術座音楽会」에서, 스스로 独唱을 했습니다.
白秋의 詩로는 作曲된 것이 最初의 作品이었습니다. 現在에 이르기까지, 奥田良三 外에, 많은 클래식 系 歌手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梁田貞은 札幌 出身으로 早稲田 大学에 籍을 두고 音樂 工夫에 힘을 써, 東京音楽学校(現 東京芸大音楽学部)에 入学합니다 卒業 後 府立一中 外에 母校인 東京音楽学校나 玉川学園 旧制成蹊高校 早稲田大学 等에서도 가르쳤습니다.
「城ヶ島の雨」가 代表作입니다만, 그 밖에「どんぐりころころ」「羽衣」 等, 數많은 童謠•唱歌를 作曲 하였습니다.
이 時期의 北原白秋에 對해서, 조금 적어 둡시다. 早稲田大学의 学生時節부터 벌써 詩名의 높았던 白秋는 26~7歳(1910~1911)頃에는, 日本을 代表하는 詩人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덧붙여, 「文章世界」의 1911年 10 月号에 発表된「明治10大文豪投票」에서는, 많은 先輩 詩人들을 제쳐놓고, 詩人의 部의 第1位에 랭크 되었습니다.
그러나, 文芸 以外의 分野에서는, 그의 生活은 苦難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福岡県에서 有数한 海産物 都賣商과 釀造場을 經營하던 親家가 1909年 이웃집 火災로 延燒가 되여 그 것이 原因으로 破産되었는데, 다음 해, 一家는 白秋에 依支해 上京해 왔습니다.
1912年, 白秋가 28歳인 때 또 하나의 災難이 닥쳐 왔습니다. 男便에게 虐待되고 있던 이웃의 有夫女• 松下俊子를 同情하고 있을 때 恋愛 関係에 빠져, 그女의 男便으로부터 姦通罪의 嫌疑로 被訴되었습니다.
姦通罪는 親告罪로 姦通된 配偶子의 告訴에 依해 刑事事件이 됩니다. 同年 7月, 白秋는 市ヶ谷의 未決 監에 2週間 拘留되었습니다만, 동생 鉄雄이 주선한 合意로 免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評價가 높았던 反動으로, 世上의 指彈은 激烈했고, 白秋의 名声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白秋는 죽기로 決心하고 千葉県 木更津으로 向해 건너갔습니다만, 죽지 않고, 건너便 三浦半島 先端인 三崎町에 닫았습니다. 거기서의 滞在 中에, 男便과 離婚하고 旧姓으로 돌아온 福島俊子(前 松下俊子)와 再会하여, 結婚합니다. 三崎町의 向ヶ崎에 있는 異人館을 빌려, 一家를 불러옵니다. 1913年 5月의 일입니다.
向ヶ崎의 南쪽에는 좁은 瀬戸를 사이에 두고 城ヶ島가 있습니다. 朝夕으로 보면서 살아온 그 光景이, 「城ヶ島の雨」의 Motif가 된 것입니다.
이 詩“城ヶ島の雨”에는 "利休鼠の雨がふる""舟はゆくゆく通り矢のはなを"라고 하는 一般的으로 理解가 어려운 句節이 있습니다.
詩에 나오는「利休鼠」는 抹茶色, 卽 綠色을 띤 灰色으로. 江戸時代에는, 抹茶色이 茶道의 大成者 千利休를 記念하여 검은 빛을 띤 利休色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하는 說이 있습니다.
「通り矢」는 向ヶ崎 바로 앞에 있는 離れ岩와의 사이의 潮水의 흐름의 빠른 部分입니다만, 지금은 埋立되어 地名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白秋는 아바지와 동생 鉄雄과 三崎에서 魚類仲買業을 始作했습니다만, 곧바로 失敗하고, 白秋 夫婦만이 남고 東京으로 올라 왔습니다.
白秋夫婦는 異人館에서 나와 같은 三崎의 臨済宗 見桃寺에서 臨時로 居處합니다 다음 1914年, 夫婦는 東京로 돌아와 一家와 合칩니다만. 生活의 어려움은 더해가고, 俊子와 父母님과의 사이가 나빴던 일로부터, 마침내 俊子와 離別하고 맙니다.
이러한 苦難의 時期에도 創作은 멈추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大詩人으로서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余談입니다만, 이 時代에 詩人에 對해서는, 모르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啄木를 筆頭로 北原白秋 萩原朔太郎 等이 모두 생활에 어려움을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日本의 各地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습니다. 都大體, 그 費用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었는지요? 芭蕉나 蕪村에게는 裕福한 弟子나 各地의 資産家가 Sponsor로 두움을 주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