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風舞い-真木ことみ///世界文化遺産 3,銀閣寺

bsk5865 2013. 4. 27. 08:40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4.27 06:53

 

風舞い-真木ことみ///世界文化遺産 3,銀閣寺(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3278 




風舞い-真木ことみ

作詞 石原信一 作曲 水森英夫


鳥もかよわぬ 岬まで
恋を忘れる 旅なのに
なんで 別れが 綴れない
まるでためらい 傷のよに
「貴方」と書いて その先は
風に言葉を 盜まれる


ひとつ大人に なりきれず
ひとつ女を 棄てきれず
割れた鏡に 紅をひく
瘦せた右手の あわれさよ
「貴方」と叫び 夕映えが
風の隙間を 染めるだけ


北へ向かえば みだれ雪
西へ下れば 秋しぐれ
どこへ逃げても 面影が
淚背負って 追いかける
貴方」と書いて 結べない
手紙破れば 風の舞い


世界文化遺産 3,銀閣寺

慈照寺(じしょうじ)는 京都市 左京区에 있는 東山文化를 代表하는 臨済宗 相国寺派의 寺院(相国寺의 境外塔頭)입니다. 一般的으로는 銀閣寺(ぎんかくじ)로 알려져 있습니다. 山 이름은(仏教寺院 이름에 붙여지는 修飾語의 하나)는 東山(とうざん)이며. 開基(創立者)는 室町幕府 8代将軍인 足利義政(あしかがよしまさ) 開山은 夢窓疎石(むそうそせき)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夢窓疎石는 実際로는 当寺創建보다 1世紀 程度 앞의 人物로、이러한 例를 勧請開山이라고 합니다).

足利義政가 造営(궁전 신사 등을 지움)한 楼閣 建築으로 観音殿을 “銀閣”이라고 通称하고 観音殿을 包含한 寺院 全体을 “銀閣寺”라고 通称하고 있습니다.

이 通称名은 近世의 名所 案内記 等에서 이미 使用되는 한편 金閣으로 通称되는 鹿苑寺 舎利殿에는 実際로 金箔이 부쳐져 있으나 銀閣으로 通称되는 慈照寺 観音殿에는 銀箔이 부쳐져 있지 않고 있습니다.

室町幕府 8代将軍 足利義政는 西紀1473年 嗣子인 足利義尚(あしかがよしひさ)에게 将軍 職을 물려주고 西紀1482年에 東山의 月待山 산기슭에 山荘(東山殿)을 만들기 始作했습니다. 이 땅은 応仁の乱으로 焼亡한 浄土寺가 있었다고 하며 近代 以降에도 左京区에 浄土寺의 地名이 남아 있습니다.

当時에는 応仁の乱이 끝난 直後로 京都의 経済는 疲弊해 있었지만 義政는庶民에게는 段銭(臨時의税)나 夫役(ぶやく、労役)을 賦課하여 東山殿의 建造를 進陟시키고 書画나 茶道에 親熟한 風流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造営工事는 義政의 死亡 直前까지 8年에 걸쳐 続續 되었지만 義政自身은 山荘의 完成을 기다리지 않고 工事開始의 다음해인 西紀1483年에 이곳으로 옮겨 살고 있었습니다. 東山殿에는 会所、常御所(つねのごしょ)等의 大規模의 建物이 세워지고 足利義満의 北山殿(後에 鹿苑寺) 程度는 아니지만 어느 程度 政治的 機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但 現存하는 当時의 建物은 銀閣과 東求堂(とうぐどう)만 입니다.

西紀1490年2月에 死去한 義政의 冥福을 빌기 爲해 東山殿을 寺로 變更하고相国寺의 末寺로서 創始된 것이 慈照寺입니다.

戦国時代末期에는 前関白 近衛前久(このえさきひさ)의 別荘으로도 使用되었지만 이것은 慈照寺의 歴代 住持에게 近衛家 出身者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前久의 死後에는 다시 相国寺의 末寺로서 再興되었습니다.

西紀1952年3月에는 庭園이 特別史跡및 特別名勝으로 指定되고 西紀1994年 “古都京都의 文化財로서 世界文化遺産에 登録되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