私は糸屋の器量よし-美空ひばり 作詞 西沢 奭 作曲 古賀政男
一 私しゃ糸屋の器量よし 朝から晩までたすきかけ くるりくるくる くるりくるくる 糸車 十七娘は春じゃもの ソレ お好きな殿御も エーエー いるわいな アーラお嫁にゃ まだ早い ハイ まだ早い
二 むこう横丁の 若旦那 丁稚に小僧に番頭さん くるりくるくる くるりくるくる やってくる 箱入り娘にゃ婿八人 ソレ 色目に流し目 エーエー 袖を引く アーラ何だか はずかしい ハイ はずかしい
三 糸のもつれはすぐとける こころのもつれは どうしましょう くるりくるくる くるりくるくる もの思い あの人ひとりにただ夢中 ソレ 糸がきれても エーエー うわの空 アーラ母さんに 叱られた ハイ 叱られた
世界文化遺産 1 清水寺 清水寺(きよみずでら)는 京都市 東山区 清水에 있는 寺院입니다.山 이름을 音羽山(おとわさん)이라고도 말합니다. 本尊은 千手観音(せんじゅかんのん) 開基(創立者)는 延鎮(えんちん,生没年不詳) 上人으로 宗派는 元來 法相宗(ほっそうしゅう)에 属해 있었으나 現在는 独立하여 北法相宗大本山으로 自稱하고 있습니다
清水寺는、金閣寺(鹿苑寺)와 嵐山(あらしやま) 等에도 버금가는 京都에서도 손꼽히는 観光名所로 季節에 關係없이 많은 参拜人으로 붐비고 있습니다.또 石山寺(滋賀県大津市) 長谷寺(奈良県桜井市)等과 나란히 日本에서도 有数한 観音霊地로서 예부터 알려져 平安時代以来 文学作品 等에도 자주 登場하는 著名寺院입니다. 古都京都の文化財의 一部로 世界遺産에도 登録되어 있습니다
西紀778年(宝亀9年) 大和 国子島寺(こじまでら=奈良県 高市郡 高取町)에 現存의 僧인・延鎮上人이 꿈에 神佛의 啓示를 받아 霊泉을 찾아와 到着한 곳이、지금의 清水寺를 새운 音羽山 이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이 山에 隱居하여 数百 年間 修行을 繼續하고 있다는 行叡居士(ぎょうえいこじ)라고 하는 修行者(観音의 化身이라고 함) 가 있었습니다 行叡는「自分はこれから東国へ旅立つので、後を頼む」라고 말을 남기고、떠나 갔답니다 延鎮은 行叡居士가 남기고 간 霊木에 観音像을 새기고 草庵에 安置하였는데 이것이 清水寺의 始作이라고 傳해옵니다
그 後 2年 뒤인 西紀780年 사슴을 잡으려고 音羽山에 들어간 坂上田村麻呂(758~811)는 修行中인 延鎮을 만났습니다 田村麻呂는 妻인 高子의 病의 快癒를 爲해 薬 材料인 사슴의 피를 求하려고 이 山에 온 것이지만 延鎮보다도 殺生의 罪를 더 느껴 観音에 帰依하여 観音像을 모시기 爲해 自宅을 本堂으로 寄贈했다고 합니다 後에 征夷大将軍이 된 田村麻呂는 観音의 加護로 無事히 東国을 平定하고 首都로 돌아 올 수가 있었습니다.
西紀798年 延鎮과 田村麻呂는 서로 協力하여 本堂을 大規模로 改築 観音像의 脇侍(わきじ)로 地蔵菩薩과 毘沙門天의 像을 만들어 함께 祭祀를 지냈다고 하나 또 다른 異說도 있습니다.
西紀805年에 坂上田村麻呂가 寺地를 下賜 받아 西紀810年 嵯峨天皇(さがてんのう)勅許로 公認의 寺院이 되고 本格的인 寺刹로 整備 되였다고 합니다.
清水寺는 “源氏物語””枕草子””更級日記””梁塵秘抄” 等의 古典文学에도 言及되어 있습니다.
清水寺는 京都에서는 珍貴한 法相宗(南都六宗の1つ) 寺院으로 오랜 期間 興福寺의 支配下에 있었는데 本堂을 始作으로 伽藍은 火災가 頻煩히 일어나 現在의 本堂은 西紀1633年에 徳川家光(とくがわいえみつ)의 寄贈으로 再建이 되고 다른 諸堂도 大部分 이때에 再建되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