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下町育ち-笹みどり///世界文化遺産 8 二条城

bsk5865 2013. 5. 4. 09:1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5.04 07:16

 

下町育ち-笹みどり///世界文化遺産 8 二条城(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3324 




下町育ち-笹みどり

作詞 良池まもる 作曲 叶弦大


三味と踊りは 習いもするが
習わなくても 女は泣ける
つらい運命の 花街育ち
義理がからんだ 花ばかり


母と呼べずに わが子と抱けず
嘘とまことで とく紅かなし
金がもの云う 浮世と知れど
金じゃとらない 左づま


忘れなければ いけない人と
知ったあの夜は 袂がぬれる
強く生きるの 女の街で
秘めてかざした 舞扇


世界文化遺産 8,二条城

二条城(にじょうじょう)는 京都市 中京区 二条通堀川 西入二条城町에 있는 江戸時代의 城입니다. 京都市街의 안에 있는 平城으로 京都観光의 名所이기도 합니다 城 全体를 史跡으로 指定한 것 外에도 “二の丸御殿”이 国宝에 22棟의 建造物과 “二の丸御殿”에 있는 954点의 障壁画가 重要文化財에 “二の丸御殿” 庭園이 特別名勝에 指定되어 있습니다. 거기에、1994年에는 유네스코의 世界文化遺産에 “古都京都의文化財”의 하나로 登録되었습니다.

日本의 歴史書에 “二条城”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여러 가지 입니다. 当時의 二条大路은 朱雀大路가 衰退한 後 首都에서 第一 큰 大路이며 足利尊氏에서 義満까지 三代의 将軍이 二条에 屋敷(邸宅)을 차렸기 때문에 将軍家의 屋敷(邸宅)를 二条陣 또는 二条城라고 했습니다.

室町時代에 平安京의 左京에 있었던 唯一한 城입니다. 덧붙처 右京에도 唯一하게西院城이 있었습니다. 二条城와 西院城을 平安京의 両城이라고도 말 합니다.

1, 室町幕府 第13代将軍 足利義輝의 居城.
2, 室町幕府 第15代将軍 足利義昭의 居城으로 織田信長에 依해 만들어진 城 二条通에는 없었습니다.
3, 織田信長가 京都에 滞在 中에 宿所로 使用하고 後에 皇太子에 献上한 邸宅 “二条新御所”
4, 徳川家康가 京都에 滞在中의 宿所로 만든 城

現存하는 二条城은 4. 의 城이며 近代의 二条城으로

幕府는 二条城라고 称하였습니다만 朝廷側에서는 이것을 二条亭으로 불렀습니다. “関ヶ原の戦”에서 勝利한 徳川家康는 京都로 上京 時 宿所로 大宮押小路에 築城을 決心하고 西国諸大名에 造営費用과 労務를 割当케 합니다.

西紀1602年 御殿・天守을 着工하여 西紀1606年에 完成합니다만 家康는 西紀1603年 伏見城에서 征夷大将軍을 補任받고 竣工前인 二条城에 入城하여 “拝賀の礼” 를 받습니다.

이에 繼續해 第2代将軍 秀忠가 또 第3代将軍 家光가 이것을 踏襲하였습니다만 第4代将軍 家綱부터는 行하여 지지 않았습니다.

西紀1611年에는 二条城의 御殿(現在의 二の丸御殿)에서 徳川家康와 豊臣秀頼의 会見을 가졌습니다만 이 때에 家康는 秀頼의 成長에 놀라 徳川家가 뒤 집힐지도 모른다는 危機感에 豊臣家를 滅亡시킬 것을 決心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西紀1614年 大坂の役(おおざかのえき)가 勃発. 二条城은 大御所(家康)의 本営이 되어 伏見城에서 出撃하는 将軍秀忠의 軍勢를 쫓아 家康는 二条城에서 大坂로 나갑니다.

西紀1615年 “夏の陣”에 있어서 二条城에 불을 질러 家康를 暗殺하려는 陰謀가 일어나 陰謀者 古田織部가 捕縛되고 이것으로 古田織部는 切腹하고 家財는 没収하는 事件도 있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