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荒城の月-多田羅迪夫///歌の背景

bsk5865 2013. 6. 14. 09:27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6.14 05:05

 

荒城の月-多田羅迪夫///歌の背景(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3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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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城の月-多田羅迪夫

作詞 土井晩翠 作曲 滝廉太郎 編曲 山田耕筰


春高楼の花の宴
めぐる盃影さして
千代の松が枝(え)わけいでし
むかしの光今何処(いずこ)


秋陣営の霜の色
鳴きゆく雁(かり)の数みせて
植うるつるぎに照りそいし
昔のひかりいまいずこ


いま荒城の夜半の月
変わらぬ光たがためぞ
垣に残るは唯(ただ)かづら
松に歌うはただ嵐


天上影はかわらねど
栄枯は移る世の姿
うつさんとてか今もなお
ああ荒城の夜半の月


歌の背景

이 노래는 오랜 歲月 日本人의 愛唱歌로서뿐만이 아니라 世界의 名曲으로 演奏되어 編曲의 数만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는 国際的인 노래입니다.

지금은 坂本九의 “上を向いて歩こう”가 世界的으로 히트하면서는 그것을 演奏하는 쪽도 많아졌습니다만 그래도 “荒城の月”의 演奏도 아직은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日本人이 멕시코에서 路上楽団의 演奏를 듣고 있는데 그를 日本人으로 보고 이 ”荒城の月”을 演奏해 주어 感銘 깊게 들었다고 합니다.

“荒城の月”가 発表된 것은 1901年(明治34年)으로 東京音楽学校(現 東京芸術大学音楽部)가 같은 해 発行한 音楽教科書인 “中学唱歌”에 依해서 입니다.

当時 初 中学生用의 唱歌라고 하면 外国 曲에 日本語의 詩를 붙인 것이 主流였습니다 東京音楽学校에서는 이 風潮을 一新하기 爲해 日本特有의 唱歌를 만들려고 企画하여 몇 個의 詩를 提示하였는데 이때 同校에 다니던 滝廉太郎는 土井晩翠의 “荒城の月”“箱根八里”“豊太閤” 의 3個의 曲을 応募하여 3曲 모두가 入選되어 英才로 알려지는 瞬間이었습니다.

作詞者 土井晩翠는 英文学者로 本名은 土井林吉(つちいりんきち)입니다 1871年 仙台市에서 태어나 第二高等中学校(現 東北大学)을 거쳐 東京帝国大学 文化大学(現 東京大学) 英文科에 入学하여 “帝国文学”의 編集員이 되어 晩翠라는 號를 쓰게 되었습니다 1897年 同 大学을 卒業하고 郁文館 中学教師를 하면서 大学院에 籍을 두고 小泉八雲 等에게서 師事를 받아 “荒城月” 뒤에 “荒城の月”의 詩를 만든 때가 이때쯤입니다 1899年 東京音楽学校 學生이었던 林八枝와 結婚하였는데 八枝의 오빠는 東京帝国大学 英文科에 晩翠의 一年 先輩이고 八枝가 予科時節 本科 生인 滝廉太郎는 研究生이었으며 1900年 第二高等学校 敎師에 就任하고 다음 해 런던에 留学하여 “中学唱歌”에 “荒城の月”가 掲載되던 해 病으로 獨逸에서 帰国途中에 “荒城の月”의 作曲者 滝廉太郎가 問病을 왔을 때에 作曲의 礼를 하였답니다. 런던大学에서 英文学을 研究하다가 1903年1月에서 4月까지 파리•소르본누大学에서 仏文学을 研究합니다 10月에서 1904年7月까지 獨逸 Leipzig大学에서 独 英文学을 研究하다가 11月에 帰国합니다. 1906年 第二高等学校 獨逸語 教師로 就任하여 繼續해 英語에 그리고 1923年에서 1926年까지 東北帝国大学 講師를 兼任하고 1934年에 第二高等学校에서 定年 退任하였습니다. 姓을 읽기를 俗称인 “どい”라고 했습니다 1950年에 文化勲章受賞을 받았고 戦火로 집과 約3万 卷의 많은 蔵書를 잃은 晩翠을 爲해 弟子들과 市民이 예전 집 자리에 “晩翠草堂”을 지어 晩年을 이곳에서 지네다가 1952年10月19日 仙台에서 저 世上으로 떠났습니다.

1898年9月 文部省은 全国中学校会議에 對하여 中学唱歌의 諮問을 實施했습니다. 以下 作詞者 土井晩翠가 1927年6月29日 滝廉太郎45年 忌日에 말한 文章의 一部 입니다. 内容은 다음 住所로 들어가시면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http://www.ne.jp/asahi/minako/watanabe/bansui.htm

東京音楽学校가 中等唱歌集의 編集을 企劃하고 当時의 小說家에게 각각의 詩를 要求했는데 그에게는 달리 要求된 것은 다른 二編과 함께 “荒城の月”이었습니다. 이 題目에 걸맞게 생각해낸 것이 会津若松の鶴ケ城이었습니다. 그런 理由는 学生時代에 두 줄기 白線 帽子가 여기에서도 많은 印象을 받았기 때문으로 압니다 (中略 여기서 鶴ケ城 戊辰戦争 下記에 記錄한 山本八重子의 노래 等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故郷인 仙台의 青葉城은 三百余年 前에 文武를 兼備한 名君 伊達政宗 卿이 “出づるより入る山の端はいづくぞと月に問はまし武蔵野の原”의 뛰어난 詩歌에 依해 近衛公의 和歌 作詞를 驚嘆하게 한 名君이 建設한 青葉城(지금은 荒廃한 城趾의 앞에서 내가 筆를 들고 있다) 이 名城도 詩의 素材를 提供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垣に残るは唯かづら、松に歌ふは唯嵐”는 그 実況입니다.

晩翠는 어릴 쩍부터 아버지 林七과 할아버지 七郎兵衛로부터 戊辰戦争에 있어 会津의 悲劇과 仙台에서 본 会津의 英雄伝을 많이 듣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第二高等学校 修学旅行 때 福島県 会津若松市의 会津若松城(別名 鶴ケ城址)을 찾아 스스로 落城의 자리에 섰습니다. 落城 前에는 山本八重子(뒤에 新島襄의 妻가 된 女性)이 화살로 휜 壁에 쓴 노래입니다.

우선 이 詞는 現代의 口語 日本語가 아니기 때문에 発音上에 注意가 必要합니다. 出版되어 있는 楽譜 中에는 3節의 “読み”가 “かきにのこるはただかつら まつにうたうはただあらし”의 部分을 보게 됩니다만 “かつら”에 對하여는 作詞者 自身이 ひらがな로 “かづら”라고 써져 있는 것으로 또 “うたう”는 文語에서는 “うとう”로 発音해야 합니다. “うたう”라고 発音하면 그 部分만큼 現代의 日本語가 되어 違和感을 느끼게 되니까요

土井晩翠는 漢詩에도 유럽 文学에도 能通하여 栄枯盛衰에 關聯된 多樣한 悲劇을 생각해 杜甫 李白 等의 漢詩도 생각해 냈습니다 하나의 일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光景을 생각할 必要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節은 “栄枯盛衰”에 있어 城이 繁昌했던 時代를 “花の宴”의 中心으로 생각하면서도 “影さして”에 包含될까에 마음이 쓰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可能性으로서는 歌詞를 城의 最後의 時代인 戊辰戦争에 스포트를 맞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鳥羽伏見의 싸움으로 薩長을 中心으로 한 軍으로부터 砲撃을 반아 会津 藩은 많은 犠牲者를 내고 나머지는 江戸로 돌아갑니다 会津藩主 松平容保는 戊辰年2月4日에 隠居하고 松平家의 相續者를 14歳의 養子인 水戸喜徳에게 讓步해 15日 봄의 달빛아래서 자그만 한 宴會가 열렸습니다.

2節의 “植うるつるぎ”에 関하여 調査한 것만으로도 10個 以上의 解釈이 있습니다 例를 들어 敗戦 뒤에 칼을 交差하여 세우는 剣과 싸움 前에 칼날이 접혔을 때의 予備의 칼 等입니다 敗戦 後의 칼을 세우는 것은 理解가 됩니다만 싸움 前의 勇敢한 빛과 予備의 칼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듭니다.

“雁が渡り、霜が降りる秋の頃、戦いで倒れた武士たちのそばに、鳴き行く雁の数をも超える剣が、あたかも植えられているいるかのように立ち並ぶ。その剣を照らしたあの光は今どこに行ってしまったのか。” 晩翠의 다른 詩에서 볼 수 있듯이 “植うるつるぎ”의 말을 漢詩에서 얻었을 可能性이나 이미 말한 것처럼 戦争에서 敗退할 때 兵器의 끝에 剣을 꽂아 그것을 交差시켜 地面에 기대어 세워 놓고 降伏을 表한 것은 確實하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만 剣의 数를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이 多数다 라 고는 느껴지지는 않네요 藩主가 바뀌어도 城은 남았던 時代가 아니고 이미 城은 過去의 時代가 되는 最後의 戊辰戦争이야말로 앞에 적은 것처럼 “荒城の月” 歌詞의 基礎였습니다. 아무래도 이와 같이 무섭고 슬프고 한심스러운 光景이 想像됩니다.

3節은 거칠어진 会津 若松城로 떠나는 “蜂じるし白二筋の帽をつけた学生時代”에 最初로 떠오른 晩翠의 모습이 “垣に残るは唯かづら 松に歌ふはたゞ嵐”는 晩翠의 故郷인 仙台의 青葉城이라고 晩翠 自身이 말했습니다만 “荒城の月”가 戦爭 前에 쓰여진 歌詞인 것부터 戊辰戦争에서 落城된 荒城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作曲者 滝廉太郎는 1879年8月 東京(現 港区)에서 태어나 그 後 아버지의 자진 転勤으로 少年時代에는 各地에서 보내게 됩니다. 以下는 数え年입니다 1882年 4歳 때 横浜에서 1886年 8歳 때 富山에서 1888年 10歳 때 東京麹町에서 1890年 12歳 때 大分에서 1891年 13歳 때 竹田에서 1894年에 東京麹町로 다시 上京하여 東京音楽学校 受験準備를 하여 같은 해 9月에 入学합니다 1898年에 本科를 卒業하고 研究科에 進学하고 1899年 研究科2年에 在學하면서 피아노 授業을 받았습니다. 1900年 6月 피아노 作曲研究를 目的으로 3年間 獨逸留学을 다녀와 같은 해 가을 “荒城の月”“箱根八里”“豊太閤”가 中学唱歌에 入選되고 다음 해 1901年에 発行된 Leipzig 音楽大学(Mendelssohn•발트 루디音楽大学)에 入学합니다. 12月에 聖야콥病院(現 Leipzig大学付属病院)에 入院하고 1902年 帰国命令을 받아 런던에서 上述한 데로 晩翠와 対面하고 3月에 従兄 大吉葬儀의 날 大分에서 1903年에 피아노曲 “憾”을 作曲하고 6月29日에 病死합니다.

“荒城の月”는 8分 音標를 主로 한 8小節로 만들어 졌습니다만 後에 山田耕筰가 音価를 바꾸어 4分 音標를 中心으로 16小節의 曲으로 하였습니다. 또 原曲은 “花の宴”의 “え”의 音에 샤프가 붙어 있었습니다 本 페이지에서는 原曲대로 샤프를 붙인 旋律로의 編曲과 잘 알려진 샤프를 削除한 旋律로의 編曲을 音色과 템포를 바꾼 2種으로 모두 3種을 掲載되고 있습니다. 両 編曲은 거이 같습니다만 前奏 後奏의 一部가 다릅니다 거기에 原曲은 “千代の松ヶ枝” 部分의 付点 音標가 “ちよの”의 “ち”의 音이 아니고 “まつがえ”의 “つ”의 音에 붙어 있습니다.

“荒城の月”의 音楽的인 魅力은 滝廉太郎가 日本語의 韻律이나 액센트에 影向을 주지 않고 아름다운 旋律를 隨伴한 것으로 생각이 드네요 얼마나 많은 日本의 노래가 韻律이나 액센트를 犠牲시켜 “の”“は”“が”等의 助詞를 強調하고 있습니까 또 日本語의 인터네이션을 重視한 나머지 旋律이 淡々한 曲에도 有感을 느끼는 境遇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日本人이 日本語와 輸入된 西洋의 音楽을 잘 調和를 이루지 못 한데서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이 노래의 編曲에 歌詞의 基礎가 된 鶴ケ城을 爲해 1868年 戊辰戦争에서 스스로 生命을 끊은 젊은 武士들의 鎮魂을 달래기 爲해 編曲한 것입니다. 激烈한 戰鬪 뒤에 城이 불타 문어 졌다고 錯覺해 飯盛山에서 割腹한 白虎隊士 外에 城을 爲해 自害한 少年들을 생각해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 그리고 最後의 숨결을 생각한 모티프를 使用했습니다. 前奏 後奏는 親舊의 死体를 눈에 떠올리며 피투성이가 되어 괴로워하는 少年의 몸부림치는 身体를 照明하고 흐린 하늘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을 細細하게 내리는 音型은 땅에 쓰러진 少年의 모습을 이미지로 했습니다.

또한 詞를 基礎로한 会津 若松城은 別名 鶴ケ城과 戊辰戦争에 對하여 編曲의 基礎가 된 白虎隊士에 對하여는 “白虎隊と戊辰戦争”은 다음의 住所를 參酌하십시오.
http://www.ne.jp/asahi/minako/watanabe/Aizu.htm

이 노래 歌詞에 얽힌 解釋에서 識者間에 많은 說往說來가 있습니다만 다음에 “植うる剣”는 大槪 이것을“出陣에 즈음하여 気勢를 올리기 爲해 혹은 싸움을 이기기 爲해 사무라이 들이 칼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모양”으로 생각 했었는데 国語学者인 高島俊男さん이 “週刊文春”에 連載한 隨筆 “お言葉ですが……”에서 簡単한 問題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お言葉ですが……”의 連載 中에 読者로부터 “植うる剣”에 對해 質問을 받은 그는 “敵의 包圍의 안에서 城兵들이 칼집에서 뺀 칼이 달빛에 반짝이는 模樣”이란 趣旨의 説明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아니다 이런 説이 있다는 등 便紙가 続々 몰려와 그것에 依해 “植うる剣”의 解釈이 実로 多樣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안에 珍説奇説의 由來도 있습니다만 바뀐 説을 主張하는 사람 自身의 學說을 主張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解釈을 反駁하는 사람 등 程度가 높게 나타났습니다.

例를 들면 前述의 隨筆 掲載 後 “高島俊男さんの……でたらめな説明にはほとほとあきれました”라든가 “……常識が常識でなくなったのを、ただ嘆くのみ”이라고 하는 高島説을 非難攻撃하는 便紙가 여러 個가 있었다고 합니다 歌詞의 意見이 이럴진대 이 “荒城の月”를 韓譯한 분 다시 깊게 생각해야 될 것 같네요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