俺はお前に弱いんだ-石原裕次郎 作詞 石巻宗一郎 作曲 バッキー白片
遅くならないうちに 今日はこのまま帰ろうね
一 つれない素振り したけれど 俺の胸は 燃えている 好きだと言えぬ なぜ言えぬ 古い傷跡 あるからさ ただ それだけ
また、ここまで来てしまった じゃー おやすみ
二 いつも別れる さようならと 暗い路地の 曲がり角 やさしく抱いて なぜやれぬ うぶなお前を 見つめたら ただ 泣けるぜ
しょうがない娘だな あまえてばかりで
三 今日も明日も 会えるのに 無理を言って困らせる 叱ってやれぬ なぜだろう 俺は お前に弱いんだ ただ それだけ
地上에 具顯된 天子의 집 紫金城 쯔진청(紫金城)의 現在 名稱은 故宮博物館입니다. 一般的으로 南쪽 正門인 午門에서 北쪽 神武門까지 가로지르는 方式으로 觀覽이 이루 워 집니다. 興味津津한 旅程의 出發點인 午門은 正面 9칸 中層 建物로 쯔진청의 規模와 展示物의 尨大함을 짐작하게 합니다. 긴 터널이나 마찬가지인 午門을 지나면 지난 數 千 年間 中國이 天下의 中心으로 自負해온 中華의 結晶體를 만나보게 됩니다.
쯔진청은 中國 베이징(北京)의 中心에 있습니다. 1406年 주춧 돌을 놓은 明나라 3代 皇帝 永樂帝로부터 淸나라 마지막 皇帝인 宣統帝까지 거쳐 간 皇帝만 24名에 이릅니다. 1949年 10月 1日 마오쩌즈등(毛澤東) 主席 이 城樓에 올라 中華人民共和國 樹立을 宣布한 텐안먼(天安門)도 쯔진청의 一部입니다. 城의 全體 規模는 約72万㎡로 長方形이 尨大한 規模답게 城內 商店이 30余 個에 達합니다.
쯔진청이 竣工된 15世紀 初盤 中國은 世界에서 가장 富强한 나라였습니다. 當代 最强國의 宮城은 하늘의 아들, 卽 天子의 空間으로 不足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를 爲해 大陸 各地에서 最高 才質의 物資와 匠人을 끌어 모았습니다. 무게가 수백 톤에 이르는 大理石을 採石場에서 옮겨와 龍을 彫刻하고, 計數가 거의 不可能할 程度로 엄청난 量의 기와와 벽돌을 구워 使用했습니다. 南北으로 긴 長方形을 이루는 中樞線上에 殿을 整然하게 配置하고,中樞線 左右에는 回廊을 만들어 크고 작은 城內 建物과 連結했습니다.
쯔완청의 基本 構造는 前朝後寢을 따릅니다. 앞쪽의 外朝는 皇帝가 政務를 펴는 空間으로 太和殿, 中和殿. 保和殿 等이 자리합니다. 그 中 正殿은 太和殿,입니다. 皇帝 卽位나 出征 等 國家 大事는 모두 太和殿에서 치러졌습니다. 太和殿 뜰은 數 万 名이 同時에 서서 머리를 조아릴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皇帝는 龍床에 앉아 世界 各處에서 온 使臣들과 進上品을 맞이 했습니다.
內廷은 皇室의 私的 空間입니다. 乾淸宮, 交泰殿, 御花園 等이 있습니다. 皇帝와 皇后, 妃嬪과 太子들이 日常을 營爲하던 곳으로 宦官을 除外한 男性은 出入이 統制되었습니다.
現在 內庭 建物 內部는 淸나라 末期의 風景이 再現돼 있습니다. 當時 使用되던 家具와 生活用品들이 展示돼 있습니다.
御花園은 內廷의 後苑에 該當됩니다. 쯔진청 內 다른 곳에는 없는 나무들과 亭子를 볼 수 있습니다. 人工 山인 堆秀山을 쌓아 올려 奇巖絶壁과 瀑布를 具顯해 놓았습니다. 야트막한 頂上에는 御景亭이 자리고 있습니다. 城 밖 出入이 自由롭지 않던 皇室 사람들은 主로 이곳에서 餘暇를 보냈다고 傳해집니다.
明나라 永樂帝는 南京에서 베이징으로 遷都하면서 옛 元나라 皇宮을 밀어내고 새로운 宮城을 지었습니다. 쯔진청 造成은 當時 정화의 南海遠征처럼 四海萬邦에 皇帝의 德을 밝히고 中華의 秩序를 具顯하는 데 焦點이 맞춰졌습니다.
中華思想은 中國에서 나타난 中心主義적 思想으로서, 中華 以外에는 모두를 夷狄(이적)이라고 하여 賤視하고 排斥하는 關念이 있기 때문에 華夷思想이라고도 합니다. 中은 ‘中央’이라는 뜻이며, 華는 ‘文華’라는 뜻으로, 中華는 自身들이 온 天下의 中心이면서 가장 發達한 文化를 가지고 있다는 選民 意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自身들 以外의 他者들을 南蠻(남만)•北狄(북적)•東夷(동이)•西戎(서융)으로 區分하여, 中國의 天子가 모든 異民族을 敎化하여 世上의 秩序를 維持한다는 ‘天下國家觀’을 낳았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는 東夷로서 數 千 年에 걸쳐 朝貢國이었으며 日本 또한 같은 길을 걸었으며 美國도 西歐의 佛蘭西 英國도 같은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니 漢族을 除外한 周邊國은 모두가 오랑캐 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天下가 모두 天子인 것으로 이 思想은 無限히 퍼질 可能性을 包含하고 있기 때문에 國境 觀念이나 領土 關念을 가진다는 것은 自身의 可能性을 不定하는 結果가 되어. 19世紀 以後 이른바 列强이 比較的 容易하게 中國의 領土나 利權을 分割할 수 있었던 것도 中國側에 明確한 國境이나 領土觀念이 없었던 것이 하나의 原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世上이 모두 天子의 것으로 領土觀念이 없었던 中國도 周邊國들과 領土 所有權을 다투고 있네요.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