おしどり人生-鏡五郞 作詞 水木れいじ 作曲 久保進一
一 こんなド阿呆に 惚れたも阿呆と 抱けばうなずく 恋女房 おしどり人生 二十年 泣いて笑うて 憂き世坂 命ふたつで 越えてきた おまえ・・・おまえ・・・ 咲いてうれしい 夫婦花
二 金も甲斐性も ないない尽くし みんな承知で ついて来た おしどり人生 幕あきは 着の身着のまま 飲みほした やぶれ屋台の 契り酒 おまえ・・・おまえ・・・ 幾度腹では 詫びたやら
三 苦労くの字に 身を折らるょうと 松のみどりは 天をさす おしどり人生 悔いはない 春をうす陽が 日にしみる おまえ・・・おまえ・・・ この手離すな いつまでも
石子詰悲話 日本人이 좋아하는 怪談이나 不可思議한 이야기,伝說 等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紹介합니다.
奈良市의 近鉄 奈良駅에서 걸어서 5,6分. 잘 알려진 興福寺(こうふくじ)五重塔 옆쪽 道路辺의 토담 앞에 ‘傳説三作石子詰之跡’라고 적힌 標識板이 서 있습니다. 周辺에는 名勝古跡이 많아 大部分의 通行人은 눈치채지 못합니다. 토담의 안쪽에 있는 것은 興福寺 寺院 中 하나인데 이 庭園에 들어서자 애달픈 이야기가 伝해지는 墓地가 눈에 들어 옵니다.
江戸幕府(1603~1867年)五代将軍・徳川綱吉(とくがわつなよし) 時代의 이야기입니다. 犬公方(いぬくぼう)라 불리던 綱吉는 사람보다 개를 所重히 여겼다고 하는데 나라에서도 사슴은 神의 使者로서 사람보다 貴하게 여겨졌습니다.
當時 이 寺院의 옆에 寺子屋(てらこや: 江戸時代의 書堂)가 있어서 절의 住持 스님이 아이들에게 읽고 쓰는 法 等을 가르쳤습니다. 그 아이들 中에 三作(さんさく)라는 13살 男子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三作가 글공부를 하고 있는데 사슴 한 마리가 다가와 아이들이 쓴 종이를 먹으려고 했습니다. 화가 난 三作는 사슴에게 文鎮(ぶんちん)을 던졌는데 잘못 맞았는지 사슴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奈良의 사슴은 春日大社의 神의 使者로 여겨졌기 때문에 當時에는‘鹿を殺した者は石子詰めの刑にする(사슴을 죽인 者는 이시코즈메 刑에 處한다’라는 규율이 있어 죽은 사슴과 함께 生埋葬을 當했습니다.
어린 三作도 이 罪는 容恕받지 못했습니다. 寺院 앞 庭園에 커다란 구멍을 파 사슴과 함께 산 채로 묻히고 말았습니다. 三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每日 寺院의 鐘을 치며 三作의 冥福을 빌었는데 三作가 죽은 지 49일째에 墓地 위에 觀世音菩薩이 나타났습니다. 그 뒤 어머니는 自身이 죽은 뒤에는 三作의 墓地에 누구도 꽃 같은 것을 놀아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寺院의 庭園에 단풍나무를 심었습니다 現在 ‘사슴과 단풍’을 그린 그림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그것 은 이 이야기에서 始作된 것입니다.
奈良 住民들이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집 앞에 사슴이 죽어 있으면 사슴을 죽인 罪人으로 여겨지므로 모두 競爭하듯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었기 때 문이라고 니다. 三作石子詰 이야기는 江戸時代中期(17世紀後半에서 18世紀前半)에 近松門左衛門에 依해 浄瑠璃(じようるり: 三味線에 맞춰 이야기하는 예능) 十三鐘(じゅうさんがね)로 쓰여 有名해졌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