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じさいの雨-真咲よう子 作詩 悠木圭子 作曲 鈴木 淳 編曲 前田俊明
一 雨に滲んだ 街灯り 泣いているように ゆれてます もっとやさしく 尽くしていたら 二人に別れは ないのでしょうか 雨 雨 雨が 雨が降り続く あなたに逢えなく なってから あじさいの花 色を変え あなたの帰り 待ってます
二 夜明け間近の 雨の中 遠く霞んで 消えていた すがりつきたい あなたの背中 もっと素直に 甘えたかった 雨 雨 雨は 雨はいつあがる あなたに逢いたい もう一度 あじさいの花 咲き乱れ 心もふるえ 泣き濡れる
雨 雨 雨が 雨が降り続く あなたに逢えなく なってから あじさいの花 色を変え あなたの帰り 待ってます
日帝 植民政策의 尖兵 東洋拓殖株式會社 "外面으로 보면 開明事業 같으나 內容을 살펴보면 韓國 사람의 눈이 먹먹하고 가슴이 깜짝 놀라운 問題 하나가 突然이 생겼으니 그것은 무엇인고? 卽 本 新聞 第 一面에 큰 글자로 쓴 東洋拓植會社라 하는 問題가 그것이다."(海潮新聞 1908年 4月 2日)
1908年 봄부터 그 해 내내 新聞 紙面을 뜨겁게 달군 것은 東洋拓殖株式會社(以下 東拓)의 設立이었습니다. 러日戰爭 後 韓國을 保護國으로 만든 日本은 經濟的 支配를 圖謀합니다. 日本의 篤農家를 移住시켜 先進 農法의 模範을 보이고 低利의 殖産興業 資金을 供給하여 拓殖事業을 한다는 名目으로 設立한 것이 東拓입니다.
乙巳保護條約과 合邦條約 當時 日本 總理였던 桂太郞(かつらたろう)가 東拓法案을 議會에 提出한 것은 3月 18日이었고, 農商工部大臣 宋秉畯은 日本에 滯留 中이었습니다. 大韓每日申報는 東拓 設立을 두고 "日本 貧民 600万 名을 植民하여 東西南北에 파리 퍼지듯이 山과 들에 등 넝쿨 얽히듯이 一草一木이라도 모두 차지하여 大韓 江山에 손이 도리어 主人이 될 것이니 一毫半點의 利益인들 韓人에게 떨어질 리 있겠는가"(1908年 4月 30日)라고 非難하였습니다.
韓國 內에 反對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8月에 兩國에서 東拓法이 公布되고 9月에 設立委員으로 日本側 82名, 韓國側 33名이 任命되었습니다. 農商工部大臣에서 內部大臣으로 傳任한 宋秉畯과 總理大臣 李完用은 設立委員에 서로 자기 사람을 심고자 민망할 程度의 다툼을 벌였습니다. 李完用이 東拓 副總裁에 自身의 兄을 薦擧하려 하자 宋秉畯은 그에 反對하여 李完用을 論駁하였습니다.
서울의 富豪 7名과 13道로부터 各 2名씩 指名된 設立委員 33名이 日本에 간 것은 形式에 不過했습니다. 東京에서 會議가 열렸는데 案件은 모두 "등을 어루만지고 목을 조르는 朝三暮四의 術策이었다."(梅泉野錄) 模糊한 句節과 不利한 條件에 對해 全南 委員 박원규 等 열두 名이 목숨을 걸고 異意를 提起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열두 活佛이라 하였지만, 宋秉畯은 設立委員이 歸國하자 그들을 明月館에 불러 晩餐을 열고 調印을 拒絶하거나 勅令 없이는 따르기 어렵다고 한 者들을 懷柔하였습니다.
마침내 12月 28日 日本 植民政策의 尖兵이라 할 수 있는 東拓이 設立(東拓 初代 總裁 宇佐川)됩니다. 株式 20万株 中 韓國 政府가 土地로 出資한 6 万株 와 兩國 皇室 支分을 除外한 13万余 株를 兩國에서 一般 公募하였습니다. 資本金은 그 해 韓國政府 豫算의 4割에 肉縛하는 1千萬원이며 그 10倍의 債券發行이 可能하였습니다. 韓人 副總裁에 前 度支大臣 민영기, 理事에 한상룡, 監事에 조진태가 包含되었습니다. 東拓 本店은 黃金町 2丁目(現 外換銀行 本店 자리)에 位置하였습니다.
공립신문은 日本新聞 万朝報에 실린 畵報 하나를 紹介합니다. "東洋拓植會社라 大書特筆로 쓴 旗를 들고 앞에 선 者는 日本情婦요 그 옆에 커다란 갓을 쓰고 기다란 갓끈을 늘어뜨리고 입을 넓게 벌리고 열 손가락을 쩍 벌리고 길가에 꺼꾸러진 者는 韓人이오 그 뒤 日本 服色에 勳牌 차고 칼 차고 괭이 메고 성큼성큼 걷는 모양은 拓植會社 委員長이오 그 뒤에 日本 農民服裝에 칼 차고 삽 들고 발 벗고 따라가는 者는 拓植會社 委員이요."(10月 28日) 비록 戱畵이지만 東拓의 性格과 韓人이 處한 實像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