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島原地方の子守唄-ペギー葉山/岩崎宏美///歌の背景

bsk5865 2013. 10. 5. 08:28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10.05 05:42

 

島原地方の子守唄-ペギー葉山/岩崎宏美///歌の背景(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4146 


ペギー葉山


岩崎宏美

島原地方の子守唄-ペギー葉山/岩崎宏美

作詞・作曲:宮崎一章(康平)


おどみゃ島原の おどみゃ島原の
梨の木育ちよ
何の梨やら 何の梨やら
色気ナシばよ しょうかいな
はよ寝ろ 泣かんで おろろんばい
鬼(おん)の池久助(きゅうすけ)どんの 連れんこらるばい


帰りにゃ寄っちょくれんか 帰りにゃ寄っちょくれんか
あばら家じゃけんど
といも飯ゃ粟(あわ)ん飯 といも飯ゃ粟ん飯
黄金飯(こがねめし)ばよ しょうかいな
嫁御ん紅(べん)な 誰(だ)がくれた
唇(つば)つけたなら あったかろ


沖の不知火(しらぬい) 沖の不知火
消えては 燃える
バテレン祭りの バテレン祭りの
笛や太鼓も 鳴りやんだ
はよ寝ろ 泣かんで おろろんばい
はよ寝ろ 泣かんで おろろんばい


歌の背景

노래의 느낌으로는, 「五木の子守唄」와 같이 예부터 노래해 이어져 온 民謡와 같이 생각됩니다만, 実은 1950年 頃에 만들어진 新 民謡입니다. 作者는『まぼろしの邪馬台国』의 著者 宮崎康平입니다

宮崎康平은 펜 네임이며, 그 밖에 耿平이란 筆名도 使用하고 있었습니다. 本名에 對해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一章, 一彰, 懋(つとむ)의 諸說이 있어, 確定할 수 없습니다.

덧붙여 JASRAC의 著作権 데이터베이스에는「島原の子守唄」의 作詞 作曲者로 宮崎一章 가 登録되어 있습니다.

宮崎康平는 1917年, 南高来郡杉谷村(現 島原市)에서 태어났습니다. 早稲田大学 文学部を卒業하고 東宝의 脚本部에 入社합니다만 곧 帰郷해 家業인 土建業을 이었습니다. 1947年에는, 島原鉄道의 常務取締役에 就任합니다.

当時의 島原鉄道는 オンボロ鉄道로 나란히 달리는 버스에 차례차례로 손님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1949年, 天皇이 長崎巡幸의 途中, 島原半島를 訪問하는 情報가 伝해왔습니다만. 当初에는 諫早(いさはや)버스로 갈아 탈 予定이었지만, 康平가 猛烈하게 한 結果 特別列車(お召し列車)를 그대로 島原鉄道에 路線 延長 運行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条件으로 路盤을 强化해, 레일을 튼튼하고 安全하게 바꾸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康平의 陣頭指揮 아래 昼夜强行의 工事가 始作됩니다만 康平은 学生時代부터 알아온 眼底網膜炎이 이때의 過労로 다음 해 失明되고 맙니다.

失明의 뒤 経済的 危機 等이 原因이 되어 妻와의 関係도 惡化되 드디어 妻는 두 아이의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家出합니다.

後에 康平는 「妻に見捨てられた我が子を抱いて、失明の苦悩にじっと耐えながら、オロロン、オロロンと土地の年寄り衆が歌っていたあやし言葉を入れて歌っているうちに、なんとなくできた」는 것이 「島原の子守唄」라고 述懐하고 있습니다.

失明을 理由로 常務取締役을 辭任한 康平이었지만 1957年7月에 島原大水害로 크게 損害를 입은 島原鉄道의 懇請을 받고 復帰하여 다시 鉄道復旧를 陣頭指揮합니다.

이 工事로 多数의 土器가 出土되면서 康平은 古代史에 強한 関心을 갖게 됩니다.

그 後 康平은 非 常勤取締役으로 물러나 再婚한 和子夫人과 함께 邪馬台国에 對해 九州全域에서 朝鮮半島까지 調査해 돕니다 그 結果를 整理한 것이 1967年에 講談社에서 発売된 「まぼろしの邪馬台国」입니다.

이 책은 空前의 히트로 日本 안에 「邪馬台国論争」을 惹起시켰습니다. 그 功으로 그 해에 創設된 吉川英治 文化賞을 受賞하였습니다. 賞은 和子夫人의 功績이 크다고 하여 夫妻 앞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生活모습에 對하여는 2008年 吉永小百合 竹中直人 主演으로 映画化되어 話題가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島原の子守唄」로 되돌립니다

康平가 子守り의 사람 詩을 흥얼거리고 있던 노래는 漸次 周邊의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여 1953 年에는 保存会가 結成되어 九州各地에서의 多樣한 行事 때에 이 노래로 춤과 함께 널리 使用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가 全国에 알려지게 된 契機는, 菊田一夫였습니다. 1952年,子守唄의 取材로 九州를 訪問해 이 노래에 感銘을 받은 菊田 一夫는 帰京後 古関裕而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같은 해 康平는 島原鉄道의 依頼로,「島原鉄道観光の歌」를 作詞합니다. 偶然히도 作曲을 맡은 것도 古関裕而 였습니다.

古関의 強한 勸誘를 받은 康平은「島原の子守唄」로서 재차 作詞 古関가 編曲하여 1957年 島倉千代子의 노래로 코롬비아 레코드로 에서 発売됩니다.

레코드 制作을 맡고 島原地方의 古謡가 이 노래의 베이스가 되였다고 여겨집니다.
왠지 康平는 自身의 作이라고 主張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레코드에는「採譜,補作 宮崎耿平 編曲 古関裕而」라고 記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後, 歌詞도 曲도 康平의 創作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以後는「作詞 作曲 宮崎一章」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島倉의 노래로「島原の子守唄」는 漸次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만, 大히트에는 밑 치지 못했습니다.

島倉 盤에서 2年後 康平은 妻城良夫와의 合作으로 別途의 歌詞를 만들었습니다 타이틀도 「島原地方の子守唄」로 바꾸워 ペギー葉山의 노래로 킹 레코드에서 発売되었습니다. 이것이 크게 히트하여 全国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上記의 歌詞는 이 ペギー葉山 盤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子守唄에는 어린이를 재우기 爲한 漢字의 뜻 그대로의 子守唄와 「五木の子守唄」와 같은 子守り娘의 不幸한 境遇나 望郷의 생각을 노래한 「守り子唄」의 2種類가 있습니다.

「島原地方の子守唄」은「はよ寝ろ 泣かんで おろろんばい」라고 얼리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부터 前者와 分類됩니다

明治時代 島原半島나 天草半島의 窮乏한 農家로부터 많은 處女가 몸을 팔러 나왔습니다 그 数는 累計20万名 아니 30万 名이라고도 합니다

그 女들은 島原半島 南端의 口之津港에 深夜 隱密하게 모여 거기서 外航船의 船底에 石炭과 함께 실려져 中国이나 東南亞細亞 各地의 娼館에 팔려 나갔습니다.

그 女들의 運命은 過酷했습니다 外航船 안에서는 船員들의 노리개가 되고 娼館에서는 쓰라린 性 奉仕나 男子들로부터 옮겨진 性病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女性들로부터 からゆきさん으로 불렸습니다.

からゆきさん속에는, 無事히 年限을 끝내 歸鄕해, 모은 若干의 돈으로 父母를 爲해서 집을 세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몸을 팔아 얻은 집인데도 不拘하고, 그러한 집은 近處로부터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からゆきさん에 對해서는, 山崎朋子著「サンダカン八番娼館-底辺女性史序章」(初版昭和47〈1972〉年)에 子細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또, 이 作品은「サンダカン八番娼館 望郷」이라고 하는 타이틀로, 熊井啓監督에 依해 東宝에서 映画化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からゆきさん들을 見聞하고 있던 康平는, 子守唄를 노래하고 있는 사이에, 自然스럽게 그러한 이야기를 歌詞에 包含시켜 갔겠지요.「島原の子守唄」의 구슬픈 멜로디는, からゆきさん들의 슬픈 運命을 노래하는데 딱 맞았습니다.

위 歌詞에 나오는 말에 對해서, 조금만 더 써 둡시다.

「おどみゃ」は「私は」の意

「しょうかいな」는 そうかいな라고 하는 意味입니다만, 여기에서는 囃子 말로서 使用되고 있습니다.

「鬼の池久助どん」은 口之津港의 対岸의 鬼池에 살던 女衒(ぜげん=뚜쟁이)을 經營하여 富를 貯蓄했다고 여겨지는 人物. 實在했는지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といも」는 고구마로, 「といも飯」는 고구마로 밥을 지은 밥. 「粟ん飯」은 조로 밥을 지은 밥. 現代의 비빔밥과 달리, 쌀의 不足한 分을 감자나 조로 補充하는 것이 目的이었습니다.

「つば」은 天草 • 島原 近處의 사투리로 입술을 말하며 不知火는 8 月 初頃 八代海에 나타나는 蜃気楼의 一種. 이 때문에 八代海는 不知火海라고도 불립니다. 「バテレン祭」는 島原나 長崎一帯에서 開催되는 포르투갈이나 네델란드, 中國의 影響을 받은 祭이며

. からゆきさん을 노래한 말은, ペギー葉山 盤 以外 쪽에서 많이 보여집니다. 그러한 歌詞 가운데, 主된 것을 無順序로 들으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山ん家は かん火事げなばい
山ん家は かん火事げなばい
サンパン船は よろん人
姉しゃんな にぎん飯で
姉しゃんな にぎん飯で
船ん底ばよ しょうかいな
泣く子はガネかむ おろろんばい
アメガタこうて ひっぱらしゅう
姉しゃんな どけいたろうかい
姉しゃんな どけいたろうかい
青煙突のバッタンフル
唐はどこんねき 唐はどこんねき
海のはてばよ しょうかいな
はよ寝ろ 泣かんで おろろんばい
おろろんおろろん おろろんばい
あん人たちゃ 二つも
あん人たちゃ 二つも
金の指輪はめとらす
金はどこん金 金はどこん金
唐金げなばい しょうかいな
嫁ごんべんな だがくれた
つばつけたら あったかろ

이 노래에 對해 더 1個 接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前半의 멜로디가 山梨県 韮崎地方의 民謡「縁故節」꼭 닮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縁故節』의 成立 年은 모름니다만, 歌詞에 使用되고 있는 말로부터 大正時代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民謠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28年에 東京中央放送局(現NHK)에서 山梨県의 代表的 民謡로서 放送된 것이 契機입니다.

그 後 몇 번이나 放送되었기 때문에, 康平의 記憶의 한쪽 구석에 새겨져 그것이 からゆきさん들의 슬픈 運命을 노래할 때에 自然스럽게 받아들여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岩手의『南部牛追い唄』와 九州의「刈干切唄」나 宮城의「お立ち酒」静岡의『子守唄』等과 아주 비슷한 例에도 볼 수 있듯이, 民謠의 世界에서는 特히 드문 케이스는 아닌 것 같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