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박기연
작사 이석우 작곡 김준영
一
거리에 핀 꽃이라 푸대접 마오
마음은 푸른 하늘 흰구름 같소
짓궂은 비바람에 고달퍼 운다
사랑에 속았다오 돈에 울었소
二
사랑도 믿지 못할 쓰라린 세상
무엇을 믿으리까 아득하구려
억울한 하소연도 설운 사정도
가슴에 서려 담고 울고 가리까
統監에게 文化財 膳物한 寒心한 皇室
나라가 망하던 순간에 국민의 눈에 가장 한심하게 비쳤을 모습은 황실과 대한제국 정부의 태도였다. 일본의 무력 앞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침략자들에게 의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부하는 듯한 황실의 태도는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 있던 황태자(이은)는 1908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생일에 순금으로 만든 담뱃갑 20개를 선물했다. 같은 달 이은의 생일에는 고종이 이토에게 2000원을 '하사'했다(대한매일신보, 1908.10.29, 11.1.). '하사'보다 '진상'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종은 이토에게 선물할 물품으로 고서화와 고서적도 대량으로 구입했다(황성신문, 1909.7.7.).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문화재를 이토에게 진상하여 일본으로 건너가도록 한 것이다.
순종은 한성미술품제조공장에 금으로 화병을 만들도록 위탁했다. 같은 해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하여 장례를 치를 때에는 조위금 10만원을 내고, 이에 더하여 국고 예비금 가운데 10만원을 은사금으로 지출했다.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병으로 물러난 후인 1910년 7월에는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금으로 만든 6000원 가격의 차관(茶罐:찻물 끓이는 주전자)을 선물했다. 같은 달 29일에는 통감부를 예방하여 신임 총독 데라우치에게 은제 꽃병 한 쌍을 하사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토가 물러나고 소네가 제2대 통감에 임명되던 1908년 7월 기념 그림엽서 2장을 발행했다. 한 장은 신구 통감의 사진이 들어 있고, 다른 한 장에는 통감기(旗)와 통감관저의 사진을 인쇄한 것이었다. 제3대 통감 데라우치가 서울에 부임하던 날인 1910년 7월 30일에도 그림엽서를 발행했다. 서울 인천 부산 평양 등지의 우편국에서 발매하고 특수통신 일부인(日附印)을 찍어주었다.
순종은 1910년 6월 31일 신•구 통감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 전임 통감 소네는 병이 들어 일본에서 치료 중이었고, 데라우치는 3대 통감에 임명되었으나 서울에 오지 않은 때였다. 소네에게 보낸 친전(親展)은 이렇게 썼다. "국정을 지도하여 그 기강이 점점 확장되고 백사가 성취한 것은 귀 자작(소네)의 근로한 공이라, 금년 봄에 귀하가 병이 있어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 짐은 속히 쾌복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렸더니…." 데라우치에게 보낸 편지에는 "귀 자작(데라우치)이 새로 통감의 임을 겸하였다 함을 들으니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노라. 우리나라의 백가지 일이 겨우 취서(就緖: 일의 첫발을 내디딤)가 되었다 하나 오히려 귀 자작이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이끌어 갈 것을 바라노라"라고 썼다. 이상은 주로 당시 신문에 실렸던 기사와 '순종실록'에서 대강 모아본 것이다. 더 많은 기사가 있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황실과 정부의 행태가 백성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의병들은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대한민보'에 실린 만화(1910년 2월 3일자)는 이런 세태를 꼬집었다. '못된 사공 만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백성들〈위쪽 만화〉과 '제 등만 더우면 제일'이라는 상류층〈아래쪽 만화〉 풍자 그림으로 당시 민심을 전하고 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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