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 시대-남인수
작사 강해인 작곡 박시춘
一
거리는 부른다 환 희에 빛나는 숨쉬는 거리다
미풍은 속 사귄 다 불타 는 눈동자
불 ~ 러라 불러라 불러라 불러라 거 리 의 사랑 아
휘 파람을 불며 가자 내일의 청춘아.
二
바 다는 부른다 정 열에 넘치는 청춘의 바다 여
깃 발은 팔랑팔랑 바람에 좋구나
저 어라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바다의 사랑아
봄 희망 멀지 않다 행운의 빛길로.
三
잔 디는 부른다 봄 향기 감도는 희망의대 자연
새 파란 지평천리 백마야 달려라
갈 거나 갈거나 갈 거나 갈거나 잔디 의 사랑 아
저 언덕 넘어 가자 꽃피는 마을로
書店, 學問과 獨立精神을 傳播하다
최남선은 1904년 10월 황실 선발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유학을 떠났다. 50명 가운데 가장 어린 15살이었다. 일본의 서점은 최남선에게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놀랍다. 그 출판계의 우리나라보다 성대함이여!" 그는 이렇게 찬탄했다.
"정기간행물•임시간행물 할 것 없이 다만 다대하다, 굉장하다, 최찬(玉+崔 璨:번쩍거리고 찬란)하다, 분복(芬馥:매우 향기로움)하다, 일언으로 가리면 엄청나다의 감이 날 뿐이라."(최남선, 입학선서 10주년, '청춘', 1914.12.)
그 후 최남선이 신문관(新文館)을 창립하여 '소년'을 비롯한 여러 잡지를 발행하면서 정력적으로 글을 쓰고 다양한 출판사업을 벌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광문회를 설립해 고전을 간행함으로써 국어 연구를 뒷받침했고, 최초의 문고본 '육전소설(六錢小說)'을 출판하여 값싸고 대중적인 책의 보급을 선도했다.
서점은 지식 전파와 함께 애국심을 고취하는 책을 보급하는 거점이었다. 전업서점의 효시는 종로의 대동서시(大東書市)였다. 독실한 기독교인 김기현이 1896년부터 독립신문에 광고를 내면서 서적판매와 출판업을 겸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폐업했다. 전업서점이 생기기 전에는 지물포나 서화포(書畵鋪)에서도 책을 팔았다. 초기 서점은 대개 주인의 이름을 붙여 아무개 서관(書館), 서사(書肆), 책사(冊肆) 같은 상호로 시작해 전업서점으로 발전했다.
한말 서점을 대표하는 회동서관(匯東書館)은 고제홍서사(高濟弘書肆, 1901.3.)로 출발했었다. 주한영책사(朱翰榮冊肆)가 중앙서관으로, 김상만책사(金相萬冊肆)가 광학서포(廣學書鋪)로 이름이 바뀌었다. 황성신문 초대 사장이었던 남궁억의 '유일서관'을 비롯하여 광동서국•신구서림•광한서림•동문관 같은 서점들이 서울의 요지에 들어섰다.
"본 서점에서 각종 신구서적을 한층 확장하여 염가로 발매하오며 경향 각 학교와 각 서관에서 청구하시면 우편이나 혹 철로로 신속히 보내주겠다"는 것은 의진서관(義進書館)의 광고였다. 신문에는 서적광고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왼쪽 사진〉(황성신문, 1908.11.14.). 앞서 1907년 6월에는 서점 주인들이 모여 도서출판의 장려를 목적으로 황성서적업조합을 결성하고 도서관과 열람실(종람소)을 설립한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황성신문, 6.21.). 1909년 12월 '의진서관'이 화재로 불타자 이듬해 5월 동업 서점들이 책을 보내주어 영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도운 것도 서적조합 덕분이었다. 광한서림 80여원, 대동서시 40여원, 동문서관 30여 원에 해당하는 책을 기부하여 상부상조를 실천한 것이다(황성신문, 1910.5.3.).
합방 이전의 출판물 가운데 역사서(월남망국사, 미국독립사), 인물전기류(비스마르크전, 을지문덕)와 역사지리(만국사, 대한신지지), 학습서(일본문법), 실용도서(양계법촬요, 지형측량술), 사회과학서(회사법), 소설(치악산, 홍도화)도 신문광고에 많이 실렸다〈오른쪽 사진〉(서사건국지). 그러나 '출판법' 공포(1909.2.23.) 이후 역사를 거울삼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책은 일제에 의해 모조리 금지처분 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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