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풋사랑-손인호 작사 이재현 작곡 이재현
一 하룻밤 풋사랑에 이 밤을 새우고 사랑에 못이 박혀 흐르는 눈물 손수건 적시며 미련만 남기고 말없이 헤어지던 아~아~아~~~~하룻밤 풋사랑
二 하룻밤 풋사랑에 행복을 그리며 가슴을 움켜 안고 애타는 심정 이 밤도 못 잊어 거리를 헤매며 눈물을 벗을 삼는 아~아~아~~~~하룻밤 풋사랑
하와이와 美國 本土의 抗日新聞들 韓•中•日 세 나라 가운데 우리는 新聞 發行이 가장 늦었습니다. 韓日修好條約이 締結되던 1876年 무렵 日本의 開港場 長崎•横浜•神戸에는 英語 日刊紙가 여럿 發行되고 있었습니다. '海外新聞'(1865), '萬國新聞紙'(1867) 같은 日本語 新聞도 널리 普及되는 狀況이었습니다. 우리가 '新聞'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였습니다. 日本人들은 海外 進出이 活潑했던 19世紀에 유럽과 美國에서도 여러 種類의 新聞을 發行했습니다. '英國人은 세 名이 모이면 클럽을 만들고, 日本人은 新聞을 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海外邦字新聞雜誌史', 1936).
우리는 政府 機構였던 駁文에서 開花와 國民 啓蒙을 爲해 처음으로 漢城旬報(1883)를 發行했고, 徐載弼의 獨立新聞(1896) 以後에 帝國新聞과 皇城新聞(1898)에 이어 여러 新聞이 創刊되면서 言論界가 形成되기 始作했습니다. 海外 發行新聞의 嚆矢는 하와이의 '신죠신문'(1904.3.27.~1905.4. 프린트판 隔週刊)이었습니다. 1900年代 勞動 移民으로 하와이에 定着한 僑民들이 發行했습니다. 또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僑民들은 共立協會를 結成하여 '共立新報'(1905.11.20.)를 創刊했습니다. 손으로 쓴 石版 印刷(隔週)로 出發하여 1907年 4月 26日부터는 活版 印刷로, 5月부터는 週刊으로 發展하였습니다. 大同報國會도 ' 大同公報,(1907.10.3.~1908.4.9.)'를 創刊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한때 2個의 新聞이 發行되었습니다.
國內 新聞이 統監府의 彈壓으로 크게 萎縮되던 時節, 美國에서는 日本의 侵略을 糾彈하는 論調의 新聞을 自由롭게 發行할 수 있었습니다. 1908年 3月 23日 田明雲과 張仁煥이 親日 外交顧問 스티븐스를 處斷하자 共立新報는 두 사람을 '愛國義士'로 讚揚하며 大書特筆했습니다. 서울의 大韓每日申報는 共立新報를 引用하여 이 事件을 報道하면서 强硬한 反日 論調를 펼쳤습니다. "오호-라 韓國 獨立은 곳 今日이오, 韓國 自由는 곳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오, 우리의 억울한 것을 裁判하는 날이니, …이 裁判을 이겨야 우리 二千萬의 獨立이 될지니."(申報, 1908.4.22.)
共立新報는 1909年 2月 '新韓民報'로 題號를 바꾸었습니다. 共立協會와 하와이의 韓人合成會가 發展的으로 統合하여 國民會(1909.2.1)를 結成한 데 따른 措置였스니다. 移民 僑胞의 本據地였던 하와이에서는 散發的으로 發行되던 여러 新聞이 '韓人合成新報'(1907.10.22.~1909.1.25.)로 統合되었다가 하와이와 本土의 僑民團體가 國民會를 創立하자 題號를 '新韓國報'(1909.3.15.~ 1913.7.31.)로 바꾸었습니다. 日帝 强占 後에는 다시 '國民報'(1913.8.1.~1968.12.25.)로 개제하여 긴 歲月을 이어갔습니다.
하와이와 本土에서 發行된 新聞은 僑民社會의 求心点이 되어 많은 獨立志士가 參與하였는데, 林蚩正•會計와 李交淡•印刷人(共立新報 時節 婦人과 함께한 모습)은 1907年 歸國하여 新報에서 抗日 活動을 展開했고, 李剛과 鄭在寬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海朝新聞과 大同共報의 主筆이 되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