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사람-성민호///새로운 선비像을 追求한 興士團(D)|★....演歌 게시판
무정한 사람-성민호 작사 성민호 작곡 성민호
一 기다려요 한마디 남겨 놓고 떠나버린 무정한 사람 잊지 말라는 그 한마디만 남겨 놓고 떠나간 사람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면은 차라리 말이나 말지 기다리라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二 사랑해요 한마디 남겨 놓고 뒤돌아선 무정한 사람 그 한마디가 가슴에 남아 행여 올까 기다린 날들 책임지지 못할 말이라면은 차라리 하지나 말지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새로운 선비像을 追求한 興士團 한•중•일 3국이 전근대에 채택한 사농공상제에서 사(士)가 관직을 장악한 지배층이었다. '사'는 중국 명•청시대에는 신사(紳士),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되었다. 양반은 신사와 달리 세습되었고 상인이 될 수 없었다. 중국과 조선에서 지식을 갖춘 독서인인 '사'를 우대한 것은 지식과 교육을 중시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데는 기여했다. 그러나 사는 특권층으로서 전문지식과 실무에 소홀한 단점을 가졌다. 도쿠가와시대 일본의 사농공상제는 조선보다 폐쇄적이었지만, 사무라이는 문과 무를 겸비하여 조선의 양반보다 실용적이었다. 또 일본의 상인과 수공업자가 각각 직업전문성을 발전시킨 점에서 조선보다 경제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은 특권층이면서 경제활동에 무관심한 양반제를 비판하면서 그 개혁을 주장했다. 그 중 유수원과 박제가는 양반층의 상업종사를 통해 양반층의 개조와 상업발달을 동시에 도모하자고 주장했다. 개항 후 혼돈 속에서 식민지화가 가속화되자 조선의 불행이 양반의 탓이라는 견해가 사회적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유길준은 일본에서 12년간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인 1907년 11월 흥사단〈작은 사진〉(흥사단기)을 창립했다. 창립 취지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국민의 문명이 진보하는 발자취는 그 지식의 계발과 도덕의 수양하는 정도에 따라 우열이 나타나고, 그 방도는 한마디로 말해 교육에 있다. 무릇 사람이 배우면 모두 사(士)이기 때문에 보통교육으로써 국민을 인도하여 사의 근기(根基)를 정해야 하니, 오늘날의 사가 옛날의 사와 다른 바이다. 옛날의 사는 사민(四民)의 하나로서 일종의 특수 계급이나, 오늘날에는 그와 달라 농•상•공 중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든지 사의 지식과 도덕을 갖추면 또한 사이다.'
특권신분으로서 양반제가 폐지되더라도 지식과 덕성을 갖춘 사, 곧 선비는 문명의 진보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유길준의 흥사단 운동은 곧 국민 모두를 선비로 만들어, 즉 사(士)를 흥하게 하여 문명의 진보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황성신문' 1908년 5월 3일자 논설은 '흥사단의 필요한 사업은 교과서 편찬, 사범(師範) 양성, 측량교수의 3건'이라고 했다.
통감부의 조사에 의하면, 흥사단 회원은 70명이었다. 황실의 궁내부는 1만원을 하사하여 지원했다. 유길준은 흥농단, 흥공단, 흥상단도 만들 생각을 하였으나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흥사단은 주권을 탈취당한 뒤인 1911년 식민지권력에 의해 해산 당했다.
그러다 1913년 안창호〈큰 사진•1912년경 캘리포니아 한인들을 모아 사진을 찍는 도산(오른쪽)〉가 유길준의 뜻을 계승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새로 흥사단을 세웠다. 새로운 흥사단의 목적은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우리 민족의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사를 '문사와 무사를 병칭하는 것으로 진정한 애국자를 일으킨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문무를 겸비한 애국자의 양성을 통해 국권회복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광수는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의 필생의 사업이요, 그의 민족운동의 근본이론이요 실천이다"고 했다. 안창호가 창립한 흥사단은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作成者 黃圭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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