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신곡)-명국환 작사 반야월, 작곡 고봉산
一 하늘을 지붕삼고 산천을 벗을 삼고 지필묵 보따리에 과거 꿈도 버렸구나 황토길 고갯마루 시를 읊는 풍류객 내사랑 가련이야 사랑하는 가련이야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천하문장 김 삿갓
二 이 세상 부귀영화 뜬 구름 갓을 지고 헤어진 배 옷 자락 삿갓 쓰고 가렸구나 울면서 잡는 손에 뿌리치고 어이가 리 내사랑 가련이야 사랑하는 가련이야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천하 문장 김 삿갓
日本, 赤十字社까지 빼앗다 1909년 7월 25일 황성신문은 '한일 적십자사 합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새로운 한일 관계로 보아 같은 목적의 적십자 사업을 분리할 필요가 없으므로 대한 적십자사를 일본 적십자사에 합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이 신문이 보도하고 있는 칙령 67호(1909. 7. 23.)에 의하면, '대한국 적십자사 사업은 시의(時宜)에 적(適)케 하기 위하여 대일본국 적십자와 회동(會同)하고 인하여 광무(光武) 9년 칙령 제54호로 반포한 대한국 적십자사 관제 및 규칙은 차(此)를 폐지한다'는 것이다.
이어 후속 절차로서 '일본 적십자사는 한국 내의 적십자 활동을 모두 관리하며 한국 경성에 일본 적십자사 한국 본부를 둔다. 한국 본부는 일본 적십자사 본사의 감리를 받는다. 활동경비는 특별 회계로 처리하고 황실이 이를 후원한다. 한국 본부에 총장과 약간 명의 부총장 고문 등을 둔다'라고 하는 부칙도 함께 발표하였다. 신한민보는 '적십자사까지 일본'이라는 제목의 기사(1909. 8. 18.)를 통해 이를 비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대한국 적십자사는 이로써 설립한지 5년도 안 되어 폐지되었다.
대한제국이 국제 적십자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러일전쟁 무렵이었다. 고종은 1903년 2월 8일 주 프랑스공사 민영찬(閔泳瓚)으로 하여금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 적십자사 본부에 정식으로 가입 서명하게 하였다. 이 해 국제 적십자사 개정 규정이 대한제국에 전달되자 고종은 1905년 9월 적십자사의 설립을 위한 준비금으로 은사금 3만2000원을 하사하고, 우선 적십자병원의 설립에 착수하게 하였다.
대한 적십자사의 설립은 칙령 제47호 '대한 적십자사 규칙'(광무 9년 10월 27일)을 발표하면서 공식화되었는데, '황제 폐하의 지존(至尊) 지인(至仁)하신 보호에 의하여 성립하고 빈곤한 상병자(傷病者)를 구호하기로 목적함이라. 천재(天災) 혹 사변(事變)에 제(際)하여 그 상병자도 구호함이라'라고 목적이 명기되어 있다. 초대 총재로는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을 임명하였고, 적십자 활동을 위해 황제 5만원, 황태자 3만원, 황귀비(皇貴妃) 1만원, 영친왕 1만원의 은사금을 별도로 하사하였다.
1905년 10월 대한적십자사의 창설〈사진〉(설립 당시의 회원들)과 함께 설립된 적십자병원은 처음에는 북서영추문(北署迎秋門:지금의 경복궁 후문)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가 점차 확대되면서 1906년 10월 지금의 원남동 남쪽으로 이전하였으며, 1907년 3월에는 대한의원(大韓醫院)이 광제원(廣濟院)과 함께 적십자병원 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대한의원은 당시 가장 규모가 큰 병원으로 1909년 7월 일본 적십자사에 병합되기까지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다. 1910년 5월 17일 일본 적십자사 총재 석흑충덕(石黑忠悳)이 한국 의약계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대한의사총합소 회원들이 환영식을 위해 일금 50전씩을 거두었다는 씁쓸한 보도(대한매일신보, 1910. 5. 10.)도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영세민 구호를 위해 1949년 4월 30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을 공포하여 40년 만에 적십자사 깃발을 다시 올렸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