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야 울지 마라-김영춘 작사 이서구 작곡 김준영
一 사랑을 팔고 사는 꽃 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二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거둬주는 바람이 분다
梨花學堂 設立 스크랜턴 女史 "이십여년 전에 한국으로 와서 이화학당을 처음 설시하고 여자 교육에 열심하던 미국인 시크란돈씨의 대부인(메리 F. 스크랜턴, Mary F. Scranton)이 수개월을 신음하다가 작일 상오 8시경에 별세하였는데 명일 하오 1시에 장례식을 상동회당 안에서 거행하고 2시에 양화진(楊花津)으로 발인하여 안장한다더라.'
스크랜턴 여사〈오른쪽 사진〉는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한국에서 근대적인 여성 교육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미국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 소속의 선교사였던 여사는 1884년 52세 때 한국에 파견되어 1885년 서울에 도착했다. 서양인에 대한 편견과 의도적인 기피로 인하여 스크랜턴 여사의 초기 한국생활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여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한국의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한국 여성의 열악한 삶의 조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착안한 것이 여성에 대한 근대적 교육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이듬해 스크랜턴 여사는 경성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중구 정동)의 한옥에서 한국 최초의 사립 여성교육기관의 문을 열었다.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한국여성을 당당한 사회인으로 양성하고자 했던 이 학교는 몇 안 되는 학생으로 초라하게 출발하였지만〈왼쪽 사진〉, 1887년 2월 고종황제가 외아문(外衙門)을 통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함으로써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출발한 작은 규모의 학교였음에도 최초의 근대적인 여성 교육기관으로 국가의 공인을 받은 셈이다. 스크랜턴 여사의 활동은 여러 차례 신문에 보도되었고, 이화학당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행사가 모두 기삿거리가 되었다. 학당 안에서 거행된 신식 결혼식도 신문에 올랐고, 학당의 학생들이 봄놀이를 나가는 광경까지도 화제(독립신문, 1899. 5. 1.)가 되었다.
스크랜턴 여사는 이화학당의 규모가 커지자 학제를 정비하고 1904년 중등과를 설치했다. 그리고 1908년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초등교육에서부터 고등교육에 이르는 일관된 교육과정과 학제를 갖추었다. 1908년 6월 제1회 중등과 졸업생 5명을 배출했다. 정동 감리교 제일회당에서 거행된 이 졸업식은 각부대신들도 참여할(대한매일신보, 1908. 6. 13.)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스크랜턴 여사는 한국의 여성의료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여성병원 설립기금을 본국에 요청했다. 1887년 미국 감리교 의사인 M.D. 하워드씨가 한국으로 파견되어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이 같은 여성 의료사업을 치하하고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보구여관은 최초의 여성 전문 의료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곳을 기반으로 여성에 대한 의학교육도 병행할 수 있었다.
한국의 여성교육과 여성 의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스크랜턴 여사는 기독교 정신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한국에 남길 원했고, 끝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