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아 도는 내력-남배송 작사 손로원 작곡 이재호
一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二 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흐르는 시냇가에 다리를 놓고 고향을 잃은 길손 건너게 하며 봄이면 버들피리 꺾어 불면서 물레방아 도는 내력 알아 보련다
總督府의 2人者 京城日報 社長 京城日報는 統監 伊藤博文의 指示로 創刊된(1906.9.1.) 日本語 新聞입니다. 이 新聞은 統監 時代에 創刊되어 總督府를 거쳐 日本이 降伏을 宣言한 後에도 約 4個月間 發行되다가 1945年 12月 10日에야 廢刊되었습니다. 40年 가까이 韓國 侵略과 植民地 統治를 宣傳했습니다. 第3代 總督 齋藤 実(さいとうまこと)는 京城日報 社長을 總督府의 2人者에 比喩하여 "政務總監은(總督府)內部의 總監이고, 京城日報 社長은 外部의 總監이다"라고 했을 程度로 京城日報의 位相은 莫强했습니다.
1906年 2月 統監에 赴任한 伊藤博文는 韓國에서 有力한 新聞을 發行하여 侵略政策에 活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京城日報라는 題號도 直接 지었습니다. 그는 京城日報에 깊은 關心을 갖고 細心한 注意를 기울였습니다. 記事를 샅샅이 읽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社長을 불러 꾸지람하거나 執筆 記者를 解職시키라고 命令하기도 했습니다.
創刊 當時에는 日本語版과 韓國語版 2種을 함께 發行했습니다. 한글版을 通해서 大韓每日申報의 氣勢를 꺾어보려 했지만 伊藤博文의 意圖는 무너졌습니다. 한글版을 購讀하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1年이 지난 1907年 9月 21日 한글版 發行을 中斷하고 日語版에 總力을 기울였습니다. 韓國 안에서 어느 新聞도 따를 수 없을 程度로 最新 施設과 日本의 一流 記者들을 불러모아 新聞을 만들었습니다.
韓日 强制合邦 後 初代 總督 寺内正毅((てらうちまさたけ)는 日本' 国民新聞(こくみんしんぶん: 1890.2.1. 創刊) 社長 徳富蘇峰(とくとみそほう: 1863~1957)에게 京城日報와 每日申報(合邦 前의 大韓每日申報)를 統合하여 두 新聞의 經營을 委託했습니다. 徳富蘇峰는 新聞 經營人이면서 論客으로도 日本에서 名聲을 날린 巨物 言論人이었습니다. 일찍이 民友社를 設立하여 '国民新聞'과 雜誌 ' 国民之友(こくみんのとも; 1887.2. 創刊)를 비롯한 雜誌와 出版 事業을 벌이는 한便 影響力 있는 글을 썼던 人物입니다.
徳富蘇峰는 政界와 言論界에 幅넓은 人脈을 形成하여 日本의 侵略을 美化하고 그 正當性을 主張한 國粹主義 思想을 지닌 人物이었습니다. 朝鮮人에게 言論의 自由를 준다는 것은 "정말로 危險千萬"한 일이며, 言論은 革命思想의 '溫床'이 될 憂慮가 있다는 論理였습니다.
徳富蘇峰는 지금의 서울市廳 자리에 京城日報 社屋을 지어 1914年 11月 入住했습니다. 1923年 末 京城日報는 서울에서 立地條件이 가장 뛰어난 이 建物을 京城府廳(市廳) 新築敷地로 讓渡하고 府廳 敷地와 隣接한 現在의 言論會館 자리에 새 建物을 지어 移轉했습니다. 서울의 心臟部인 現 서울市廳과 그 뒤便에 位置한 20層 建物 프레스센터는 日本 言論侵略의 本山이 서 있던 자리입니다. 徳富蘇峰는 1918年 6月에 물러났고, 1920年代 以後의 社長은 유럽 여러 나라의 大使를 歷任했던 華麗한 經歷의 職業 外交官, 貴族院 議員, 県의 知事 等 巨物級이 任命될 程度로 京城日報는 政治的 比重이 컸으며, 新聞은 總督府로부터 '官報'에 버금가는 權威를 賦與 받았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