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泣かされて-永井みゆき///故郷忘じがたく候

bsk5865 2014. 8. 15. 19:15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8.15 06:54

 

泣かされて-永井みゆき///故郷忘じがたく候(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5469 


泣かされて-永井みゆき


泣かされて-永井みゆき

作詞 たかたかし 作曲 伊藤雪彦 編曲 前田俊明


戻ってほしいの もう一度
女の気持ちが わかるなら
あれほどうらんだ 人なのに
酔えばみれんに 泣かされて
女が女にまけそうな
ああ 一人酒


あなたが残した 合鍵は
捨てずにいまでも おいてある
あれほどうらんだ 人なのに
肩のさみしさ 肌寒さ
ああ つらい夜


お酒に抱かれて ねむるより
あなたの馴染んだ 胸がいい
あれほどうらんだ 人なのに
ひとり出直す はずなのに
女が女にまけそうな
ああ 一人酒


故郷忘じがたく候

「故郷忘じがたく候(こきょうぼうじがたくそうろう)」……는 薩摩上陸 以来200年이나 지난 어느 날, 물어 물어 찾아온 사람의 무름에 중얼거리며 對答한 故老(옛일에 밝은 노인)의 말입니다.

鹿児島市를 뒤로하고 薩摩半島를 横断하여 西쪽을 向하면 薩摩焼き의 故鄕「苗代川」(薩摩말로 ノシロコ), 日置市 東市来美山에 이릅니다.豊臣秀吉의 壬辰倭亂(1593~1598年)때에 薩摩의 島津軍에 잡혀 連行된 朝鮮陶工藝人이 여기에 住居地로 자리 잡은 지 400年. 道路 가에 「沈寿官窯」라는 곳이 있습니다.

清涼剤로서 紹介하고 싶은 것이 司馬遼太郎氏의「故郷忘じがたく候」입니다.이 책에 對한 疑義도 있는 일도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沈寿官의 自負心 强한 모습에 心醉하고 싶은 氣分입니다.그런데 沈寿官 一家가 日本에 온 것은 豊臣秀吉의 壬辰倭亂 때의 일이었습니다.

1597年 朝鮮 全羅北道 南原城의 싸움에서 뒤 늦게 도망치려다 붙잡힌 70 名의 男女가 島津軍의 捕虜가 됩니다. 이 때, 왜 朝鮮磁器의 工人을 捕虜로 했는가는 確實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結果的으로 連行되어 온 捕虜가 瓷器의 技術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終戦의 混乱 속에서 日本에 끌려온 沈氏의 先祖는 鹿児島県의 串木野 곁의 島平 라고 하는 海岸에 上陸합니다.

불러도 對答 없는 荒凉한 風景이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鹿児島라는 地名조차도 알지 못하고, 方向도 몰라, 누구를 찾아가는 일도 없이, 白衣의 옷자락을 밟고 모래 沙場을 헤매어, 患者는 누워, 婦人은 울어, 哀哭의 소리는 近處로 가득 찼습니다.

悲慘한 狀態에서 恨歎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남아야 될 絶對絶命의 狀況에서. 代代로 陶工이었던 沈氏의 先祖들은, 여기에서도 陶土를 찾아 가마를 만들어, 焼き物를 만들기 始作합니다.

그리고 철없는 本土 住民으로부터 嫉視의 눈으로 뵈어 모래 沙場을 쫓겨나 苗代川라는 곳에다 자리를 잡습니다.이 周邊이, 故鄕山川을 닮았네 하는 것이 苗代川에 居住地를 定한 理由였다고 합니다. 「朝鮮から連れてこられた陶工が苗代川にいる」라고 하는 所聞은 드디어 鹿児島까지 닿아, 当主인 島津義弘가 사람들 모두를 鹿児島 城壁아래에서 居住케하라. 집도 주고 保護도 더해라. 하며 陶工들을 부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陶工들은「高恩感泣スベキコトナレドモ鹿児島ノ城下ニハ参リマセヌ」라고 그 提議를 拒絶합니다. 使者가 理由를 물으니「故郷、哀シク候」이라고 對答합니다. 그것을 들은 使者는 「듣는 게 좋다. 이 苗代川에서 鹿児島까지는 不過 六里에 지나지 않다. 그런데, 이 마을에 있으면 故鄕 슬프지 않고, 六里 저 便의 鹿児島로 가면 故鄕이 그립다 하는 것은 放恣한 말투가 아닌가? 」라고 다시 質問합니다. 그러자 陶工들의 中에 나이가 지긋한 長老는 이렇게 對答합니다.

「苗代川 近處에 있는 山자락의 언덕에 오르면 東 中國海가 보인다. 그 바다의 아득한 저 便으로 朝鮮의 山河가 가로 놓여 있다. 우리는 天運이 없어 先祖의 무덤을 버리고 이 나라에 이끌려 왔지만, 그러나 그 언덕에, 祭壇을 마련해 先祖의 祭祀라도 드리면 아득하게 朝鮮의 山河가 感應해, 祖國의 江山에 주무시는 祖上의 靈魂을 慰勞할 수 있을 것이다.」이 말은 意外롭게도 島津義弘의 憤怒를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苗代川에 땅과 집을 주어서」라는 말로 苗代川에서 沈氏들의 歷史가 始作되었습니다. 그것은 卽 薩摩陶磁의 歴史의 始作이었습니다. 島津家의 도움도 있어 揖宿郡과 川辺郡에 매우 適合한 陶土가 發見되고, 釉薬의 原料도 発見되었습니다. 朝鮮朝의 白磁와는 조금 色다른, 두께가 매우 얇은 陶器-白薩摩를 만들어 냈습니다. 島津家의 政策으로 白薩摩는 貴重品이 되어, 苗代川의 가마는 藩立工場이 되었습니다.

以後 三百年 白 薩摩의 技法은 進化를 거듭해 世界의 陶芸 안에서도 이 程度 精巧한 것은 없지 않을까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初代부터 세어 13代의 沈寿官이 各各 伝統을 길러 왔습니다.

그 後의 十四代 沈寿官 少年은, 中學校에 入學하자 마자, 朝鮮人이라고 하는 理由로 暴力的인 괴로움을 當합니다.

數十 名으로부터 실컷 얻어맞고 집까지 겨우 到着한 少年이 거기서 본 것은, 집 앞에 서있는 両親의 모습이었습니다. 반드시 少年이 괴로움을 當할 것을 予想하고 있었겠지요. 그러나「もうあんな学校には行かない」라고 하는 少年에게 十三代 沈寿官氏는 冷厳하게 꾸짔습니다.

「너에게는 自負心 强한 피가 흐르고 있다. 島津義弘가 불러도, 當時 背反者의 朝鮮人도 살고 있던 鹿児島에 사는 것을 決斷코 拒絶하고, 故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이 苗代川에 살 터를 지었다. 當時 島津義弘에게 反抗하는 것은 죽음을 意味했다. 거기에도 굽히지 않고 자랑을 일궈낸 先祖의 피가 너에게는 흐르고 있다」

第一이 되어라 싸움도 工夫도 第一이 되어라 그러면 周圍로부터 輕視 받지 않는다, 라고 父親으로부터 說得되어 少年은 싸울 것을 決意합니다. 薩摩에서는, 少年이 다른 少年에 對해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만으로 挑戦의 뜻을 伝할 수 있었습니다.

毎日 沈少年은 다른 少年과의 死鬪에 자나깨나. 그리고 3學年이 되었을 때, 同年의 다른 少年 모두를 屈伏시켰습니다. 朝夕으로 3年間 싸움으로 지센 것은, 第十四代 沈寿官뿐일 것입니다, 日本人 以上으로 自負心 强한 少年이었습니다. 自負心이 强한 沈寿官은 芸術的인 関心에 눈을 떠 展覧会用의 作品을 求할 수 있게 됩니다.

「展覧会 等은 浮華인 物件에 지나지 않는다. 十三代에 걸쳐 繼續 되어 온 歷史가 네가 짊어지고 가야 할 것으로, 展覧会 等에 눈을 돌릴 틈이 너에게는 없다」젊은 沈寿官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反抗하고. 十三代의 当主에게 그것을 諫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이 芸術에의 衝動은 어떻게 抑制합니까. 나의 人生은 무엇을 爲해서 있습니까? 가르쳐 주세요! 」

十三代沈寿官翁은 한 마디만으로 答합니다. 「息子を、茶わん屋にせい」나의 役割은 그 만큼 밖에 없고, 너의 役割도 그 만큼 밖에 없다, 라고. 十三 代가 죽은 後, 집을 이은 沈寿官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서 伝統을 지키기로 합니다.

老境이 되어 沈氏는 韓國으로 旅行을 갑니다. 서울大에 招待되어 講演을 맡은 沈氏는 서울大의 大講堂에서 學生들을 向해 밝게 이야기합니다만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은 말씀 드려도 좋은지 어떻지……나에게는 韓國의 學生 諸君에게서 希望을 봤습니다. 韓國에 와 多樣한 젊은 사람을 만났지만, 젊은 사람이 모두가 입을 모아 36年間의 日本의 壓政에 對해 말하고 있습니다. 至當하다고 하겠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말하는 일은 젊은 韓國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일 인가. 말하는 것은 좋아도 지나치게 되면 그 때의 心情은 벌써 등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새로운 國家는 恒常 앞으로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이 心情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あなた方が三十六年を言うなら……」「私は三百七十年を言わねばならない」

司馬遼太郎(しばりょうたろう)

日本의 小説家로 本名은 福田定一(ふくだていいち)로 1923年(大正12年) 大阪市에서 태어나 大阪外国語学校 蒙古語科를 卒業하고 1960年(昭和35年)「梟の城」에서 第42回 直木賞을 受賞하고, 1966年(昭和41年)「竜馬がゆく」「国盗り物語」로 菊池寛賞受賞을 1972年(昭和47年)「世に棲む日日」를 中心으로 한 作家活動으로 吉川英治 文学賞을 受賞합니다,

1976年(昭和51年) 日本芸術院恩賜賞受賞. 1981年(昭和56年) 日本芸術院会員 1982年(昭和57年)「ひとびとの跫音」에서 読売文学賞을 受賞 1983年(昭和58年)「歴史小説の革新」에 對한 功績으로 朝日賞 受賞. 1984年(昭和59年)「街道をゆく“南蛮のみち1”」에서 日本文学大賞을 受賞. 1987年(昭和62年)「ロシアについて」에서 読売文学賞을 受賞. 1988年(昭和63年)「韃靼疾風録」에서 大仏次郎賞을 受賞 1991年(平成3年) 文化功労者을. 1993秊(平成5年)에 文化勲章을 受章 1996年(平成8年)에 死亡합니다.

四百余年前 南原城에서 끌려간 朝鮮人 捕虜 七十 名中 十七 個 姓氏(朴, 金, 鄭, 李)中에 明治 後 朴氏는 東郷 氏로 姓을 改名하였는데 後에 日本帝国 外務大臣 東郷茂徳(とうごうしげのり)가 그 後孫입니다. 그러나 四百余年을 變함없이 韓國人 姓氏를 固執하는 沈寿官氏 一家의 民族魂에 깊은 敬意를 드립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