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백마강-백년설///王仁

bsk5865 2014. 10. 24. 09:2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0.24 06:45

 

백마강-백년설///王仁(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027 



백마강-백년설

작사 고려성 작곡 이재호

(대사)
백마강 흘러 흘러 700년 역사도 흘러가고
고란사의 종소리는 누가 치기에
끝 없는 낙화암에 저녁노을 섧기도 하다
무너진 부여성의 그 전설을 안다면은
길손은 詩 한 수를 읊고 가리라.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모 치면은
구곡 간장 오로지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낙화암 달빛만 옛날 같구나.


王仁

다른 이름; 화이길사(和邇吉師)/조고주(照古主)

생애와 업적

왕인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물론 우리나라의 어떤 고대 기록에도 전하지 않는다. 그가 살았던 영암군지역에 전설과 유적이 전하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몇 가지 문헌에 등장할 뿐이다. 반면 일본사서인《고사기》와《일본서기》에는 왕인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이를 근본 사료로 하여 그의 행적을 추적해볼 수 있다.

백제의 왕이 아직기를 보내어 좋은 말 두 필을 바쳤다. 이를 말구유에서 기르게 하며 아직기에게 관장하게 했다 아직기 또한 능히 경전을 읽었다. 그래서 태자토도치랑자가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천황이 아직기에게 묻기를‘혹시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 고 했다. 아직기가 답하기를‘왕인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뛰어났다’ 고 말했다 왕인이 왔다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모든 경전을 왕인에게 배워 통달하지 아니 함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은 서수(書首)등의 시조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또 다른 기록 인《고사기》에는 왕인이《논어》10권과《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와 학문을 가르쳤다고 했다.

이 간단한 기록과 몇몇 전설을 기반으로 왕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우선 왕 이 살았던 시대는 백제 17대 왕인 이신 왕(재위 392-405) 때로 볼 수 있다. 당시 백제는 북방으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고 신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왕이 왜국과 우호 를 맺고 태자전지를 볼모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아시왕 6년 기록에 전한다. 이때 볼모로 간 태자전지가 일본기록에 전하는 아직기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아직기는 말 두 필을 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 보다가 그가 경서에 능통함을 안 일본 왕이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7년 뒤 아직기가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일본 왕이 그를 대신 할 학자를 추천해달라고 하자 아직기가 추천한 사람이 왕인이다.

이후 왕인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는 오로지 영암 지방에 전하는 구비전승에 의존한다. 그 이야기들에 따르면,왕인은 영암군 성기 동에서 태어났으며 여덟 살 때부터 문산재(文山齋)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일본에 건너가기 전까지 그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문산재는 수많은 선비와 학지를 배출한학문의 전당 이었다. 왕인의 학문은 도성과 왕실에까지 널리 알려졌고,왕은 왕인을 여러 차례 불러 태학에서 일해줄 것을 종용했지만,왕인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자신을 있게 해준 문산재에서 후학을 기르려는 뜻 때문이었다. 왕도 결국은 왕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틈틈이 도성으로 초빙해 태자 와 벗하며 학문을 논하도록 했다. 태자의 학문도 경전을 해독할 정도에 도달해 있었지만,왕인의 학문은 태자가 만날 때마다 감탄할 정도였다.그랬기에 일본 왕의 물음에 왕인을 추천할 수 있었다.

아직기가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만 해도 일본에는 문자가 없었다. 그러나 백제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국가질서의 수립이나 문화적 기반에 있어서는 고구려보다도 앞서 있었다. 학문과 문예가 발달해 경사(經史). 문학뿐 아니라 음양오행 •의약•점상(占相)에 이르기까지 전문 분야의 기술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논어》10권과《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왕인은 태자의 스승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군신들에게도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다. 왕인으로부터 한문을 배운 일본은 비로소 학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충•효•인 •의 등의 유교덕목을 배웠다. 왕인을 뿌리로 하여 일본에 학문이 보급되고 교육의 기틀이 잡혔다. 또한 왕인이 일본에 건너갈 때 함께 갔던 재봉녀 •직공 •도공 •화원 등의 기술자들이 백제의 기술을 일본에 전수함으로써 일본 고대 문화 발달의 씨앗을 뿌렸다.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 문화가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왕인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사카에 그의 묘가 있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일본에 살면서 기록을 맡는 사(史)가 되었으며, 일본 조정에 봉사해 일본 고대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여기까지가 일본 쪽 자료와 영암 지방 구비전승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백제에서 ‘박사 라는 호칭이 쓰인 시기가 6세기이며 일본에 전한《논어》10권이 양 무제 때 편찬된 《논어의소: 論語義疏》로 보이는 점 등을 근거로 왕인이 4세기 인물이 아니라 6세기 인물 이라는 주장도 있고,일본에서 왕인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진 것이 1930~1940년대‘내선일체’를 외치던 정치적 목적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 등이 힘을 얻고 있다. 4세기 인물인지 6세기 인물인 지조차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큼 왕인은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인물로 그에 대한 판단은 조심스럽다.


평가

“공자는 춘추시대에 태어나 만고불후의 인륜도덕을 밝혀 천하만 에 유림의 시조가 되었다. 박사 왕인은 공자가 죽은 지 760년 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 황실의 태자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梯)의 도를 가르쳐 널리 일본 국내에 전수하여 1653년간 계승시켜오고 있다. 천고에 빛나는 박사 왕인의 위덕은 실로 유구유대함이 그지없어라"

일본 우에노 공원에 있는 박사왕인비의 내용이다.
왕인이 죽은 뒤 일본 조정에서는 문인직(文人職)의 시조인‘서수’라는 존칭을 내렸고,대화십시현(大和十市縣)을 내려 지금도 이곳은 백제군 또는 백제향이라 일컬어진다. 이후 일본에서 왕인은‘문학의 시조’요 ‘국민의 대은인’으로 칭송 받아왔다.

그러나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가 보수화되면서 왕인에 대한 일본의 시각이 크게 변하고 있다. 왕인이 중국인이라고 왜곡하기도 하고,실재하지 않은 전설 속의 인물이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백과사전이나 교과서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국내에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때문이겠지만 왕인에 대한 국내 기록은 조선 정조 때 한치윤이 쓴《해동역사》에 와서야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이후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왕인 전설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고,1987년 왕인의 생가 터, 동료들과 담론했다는 양사재,홀로 밤낮없이 공부했던 책굴 등이 유적지로 조성되었으며,현재는 해마다‘영암왕인문화축제’가 열려 우리의 우수한문 화를 일본에 전한 왕인의 공을 기리고 있다.

이렇듯 영암 일대에 왕인에 대한 전설들과 유적들이 전하지만,그 가운데 일부는 영암에서 출생한 또 한 명의 인물 도선국사의 전설과 섞이고 중복되어‘그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의 문화시조로 일한 사람을 추앙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아스카문화

7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일본 아스카(飛鳥) 지방에서 피어난 고대 문화.불교적이며 대륙적이고 국제적인 색채가 짙은 이 문화는 백제 문화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백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교 •불교를 비롯하여 건축 •조각 •회화 등 대부분이 백제를 비롯하여 고구려,신라의 학자,승려,유민 등에 의해 전수되었다.


도선

신라 말의 승려이며 풍수지리설의 대가로,성은 김씨(金氏)이며 영암 출신이다. 신라 왕실의 후예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곡성 동리산의 혜철을 찾아가서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후학들을 길렀는데,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이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듣기도 했다. 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라는 시호를 내렸고,고려의 숙종은 대선사를 추증하고 왕사를 추가 하였으며,인종은 선각국사로 추봉하였다. 도선은 승려보다는 풍수지리설의 대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 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 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했는데,그 예언대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역대 고려왕들은 늘 극진히 존경했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훈요심조>에서도“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 고 하였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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