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헤어지면 그리옵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내 심사 믿는다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아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이내 청춘
二 좋다 할 땐 뿌리치고 싫다 할 때 달겨드는 모를 것 이내 마음 봉오리 꺾어서 울려놓고 본체만체 왜 했던가 아아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이내 청춘
聖王과 眞興王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
聖王
다른 이름: 명왕(明王) 성명왕(聖明王)
백제 26대 왕 성왕은 진흥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냈으니,진흥왕의 장인인 셈이다. 그러나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 진흥왕의 손에 잡혀 죽음을 당하고 그의 두개골은 신라 관청이 있는 북청 계단 밑에 묻혔다. 우리나라 역대 왕들 가운데 전쟁터에서 상대방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참수를당한 왕은 백제의 21대 왕인 개로왕(재위 455~475)과 성왕,이렇게 둘뿐이다. 그 가운데서도 성왕은 노비에게 목이 잘려 신라인이 드나드는 길 목에 묻혔으니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할 수 있다. 성왕과 진흥왕,이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5세기 중반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이후 동성왕과 무령왕을 거치면서 차츰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이를 기반으로 성왕은 백제의 부흥을 꾀하면서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나섰다.
眞興王
다른 이름: 김삼맥종(金三麥宗)/김심맥부(金深麥夫)
551년 성왕은 신라와 가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다. 이때 백제군 이끌고 있던 것은 왕자 여창이었고, 신라군의 총대장은 거칠부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권력투쟁으로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공격하여 승리함으로써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점령했다. 승리한 뒤 여창은 다시 사비로 돌아가고 나머지 병사들로 하여금 빼앗은 성을 지키게 했다.
당시 신라의 왕은 진흥왕이었다. 일곱 살에 즉위한 진흥왕은 왕 태후 김씨의 섭정을 받았으나,즉위 12년(551년) 무렵부터는 직접 국정을 돌보았던 듯하다.그리고 열여덟의 이 젊은 왕은 553년 갑자기 배신의 칼을 빼 든다. 가야의 왕자 출신인 김무력을 시켜 백제 군을 급습한 것이다.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를 빼앗은 진흥왕은 여기에 새로운 주를 설치했다. 433년 신라와 백제 사이에 맺었던 나제동맹을 과감히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의 새로운 밀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당시 새롭게 일어난 돌궐 족의 남침으로 위기에 몰린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었고,이 밀약을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의 묵인 아래 군사를 일으켜 백제가 차지한 한강 유역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성왕은 80여 년 만에 어렵게 되찾은 한강 유역을 다시 빼앗겼다. 그런데도 성왕은 쉽사리 보복 전을 펼치지 못했다. 오히려 신라왕실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 보내는 굴욕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당시 백제의 지배층은 신라와 싸우자는 파와 싸우지 말자는 파가 나뉘어 있었다. 신라와 싸우자는 주전파(主戰派)는 성왕을 비롯한 태자 여창이 중심이 되었고,싸우지 말자는 비전파(非戰派)는 주로 귀족 세력들이었다. 성왕은 일단 귀족들의 말을 들어 공주를 진흥왕에게 보내며 기존의 동맹관계를 깨지 말고 한강 유역에서 병력을 철수할 것을 요청했지만 진흥왕은 그 요구를 거절했다.결국 성왕은 신라 공격을 결정하고,신라 정벌 총사령관으로는 태자 여창을 임명했다.여창은 군대 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쳐들어갔다.백제가 관산성을 차지한다면 지방 한강 하류 지역에 머물고 있는 신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땅으로 손쉽게 갈 수 있는 관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관산성은 백제나 신라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성이었다. 554년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건 관산성 전투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들간의 전쟁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으로 기억된다.
결국 관산성은 백제군에게 함락되었고,여창은 구천이라는 곳에 본진을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관산성 전투의 승리를 보고받은 성왕은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사비성을 떠나 구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방심했던 것일까. 성왕은 친위군대 50명만을 이끌고 적진으로 달려가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이 정보를 입수한 진흥왕은 김무력의 군대를 이동시켜 성왕을 기습했다.구천 근처에 매복해 있던 김무력의 급습을 받은 성왕은 사로잡혔다가 노비 출신인 고우도도의 손에 목이 달아났다. 이 여세를 몰아 신라는 관산성을 되찾았다.이 전투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네 명,사졸 2만 9,600 명이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삼국사기》에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다”고 기록했을 만큼 비참한 최후였다. 금관가야 출신의 김무력은 이 전투로 신라에서의 지위를 단단히 굳혔고,그 지위는 손자 김유신에게까지 이어졌다.
이제 한강 유역은 완전히 신라의 지배권 아래 놓이고,백제와 연합했던 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되었다가 562년 신라에 무력 정복되어 멸망했다.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백성들이 성왕이라고 칭하였다. 《삼국사기》“천도지리(天道地理)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 ≪일본서기》는 평가를 받는 성왕은 백제를 제2의 전성 기로 이끌었으나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일으켰고,신중 하게 행동하지 못한 탓에 결국 치욕스런 죽음을 맞았다.
반면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도 냉정하고 치밀한 정세분석과 판단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