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꿈꾸는 백마강-박경원///義慈王

bsk5865 2014. 10. 30. 13:2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0.28 06:00

 

꿈꾸는 백마강-박경원///義慈王(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061 


꿈꾸는 백마강-박경원


꿈꾸는 백마강-박경원

작사 임재범 작곡 방준석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찟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義慈王

다른 이름: (海東曾子)

생애와 업적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 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와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의 인구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 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중기 최고 시인이자 문인이었던 민제인의〈백마강부〉라는 시에서‘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을 처음 찾을 수 있는데,이는 문인들의 문학적 상징어로 이해해야 한다. 이후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대중가요에 삼천 궁녀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수십 곡 불리면서 의자왕은 3,000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왕으로 왜곡되었다. 즉, 삼천 궁녀는‘방탕했던 호색 군주’라는 의자왕의 이미지를 완성시킨 후대인 들의 상상력 일뿐이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라 불리웠다고《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고,당으로 압송된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의 묘지석에“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려깊다”라고 평가 받은 의자왕이지만 한 왕조를 멸망에 이르게 한 죗값을 후대에 두고두고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서동요>로 널리 알려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로맨스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하여 의자왕의 어머니가 선화공주라 했다. 그러나 신라의 공주가 백제의 왕과 결혼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또한 다른 기록들을 보면 진평 왕에게는 딸이 둘뿐이었다. 당시 신라와 백제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서도 이는 잘못 전해진 듯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한 다음 해 정월 어머니가 사망하자 동생과 내신좌평(內臣佐平)등 유력한 귀족 40여 명을 숙청해 왕권을 강화했다. 당시 백제에는 대성 8족이라는 전통적인 지배집단이 있었다. 한강 유역을 빼앗기면서 백제 왕권이 추락하자 이들 대성 8족은 최고 관등인 좌평 직을 독점하면서 왕권을 견제해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국왕을 살해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다.

대대적인 숙청 이후 귀족 세력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했다. 642년 7월에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해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바로 다음달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품석과 그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트렸다. 대 내외적인 이런 작전을 통해 의자왕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해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 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 정책으로 돌아섰다. 신라가 당나라와 밀착하고,또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국에 대한 강경노선을 펴자 그 영향을 받은듯하다.

643년 백제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신라 공격을 계속했다. 한강 유역 수복은 당나라의 간섭으로 일단 좌절되지만 신라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를 차단하려고도 했으며,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군을 동원한 틈을 타서 신라 서쪽 방면의 7성을 빼앗기도 했다.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백제의 최대 숙원이었던 한강유역 30여 성을 회복했다. 이러 한 정복 활동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되었으나 재위 14~15년 무렵부터 내부 체제는 심각한 동요를 겪는다. 의자왕의 왕권 강화 노력에 귀족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대사평 사택지적이 은퇴를 하고,좌평 임자가 김유신과 내통을 하고,왕에게 극간을 한 성충이 투옥되었다가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는 기록은 당시 귀족 들의 반발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의자왕은 재위 17년(657년) 41명의 아들을 좌평으로 임명 하고 각각에게 식읍을 주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귀족들의 정치적 역할을 더욱 축소시켜버렸다.

이렇듯 백제가 심각한 내부 위기를 겪고 있을 무렵 나당연합군 을 결성한 신라는 660년 마침내 백제 공격을 개시했다.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은 수로로 백강을 건너오고,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해왔다. 소정방이 덕물도에서 김유신과 만났을 때에도 당나라의 공격 목표가 고구려일 것이 라고 낙관하던 의자왕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당연합군은 이미 왕도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금강 하구에서 당군을 막던 군사도 패하자 사비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했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당군에 항복했다. 흑치상지가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지 10여 일도 못돼 3만여 명의 백제 유민을 모아 200여 성을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반해,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백제가 계백의 황산별 전투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한 채 10여 일만에 항복했다는 사실은 지배층이 얼마나 분열되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항복한 의자왕은 태자와 왕자 및 대선과 장사 88명,그리고 1만 2,000여 명의 백성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병사했다.


평가

《삼국사기》는“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라며 백제 멸망의 책임을 의자 왕에게 돌렸다. 또한 이렇듯 향락에 빠진 왕에게 좌평 성충이 강력하게 간언하자 왕은 그를 옥중에 가둬 굶어 죽게 했고, 이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기는 어렵지만,의자왕은 유독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 서가 전하지 않고,백제와 적대관계였던 신라에 흡수 통합되어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모습이기에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왜곡의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물론 최고 통치자로서 백제 멸망의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들은 의자왕이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비난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그보다는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군대를 막기엔 백제의 국력이 역부족이었다고 풀이한다.

신라가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백제를 이끌었던 왕이었으며,자애로운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지는 의자왕의 모습 이다.


좌평

백제의 관직은 16품으로 나뉘는데,그 중 가장 높은 1품 관직이 좌평이다. 왕명의 출납등 왕의 명령에 관계된 일을 하던 내신좌평(內臣佐平),국가와 궁궐의 재정을 맡았던 내두좌평(內頭佐平),국가와 왕 관련 행사 등을 주관 하던 내법좌평(內法佐平), 왕의 경호와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던 위사좌평(衛士佐平),법률에 관계된 일을 관장하던 조정좌평(朝廷佐平),국방 및 안보를 책 임지던 병관좌평(兵官佐平) 이렇게 6명의 좌평 가운데 내신좌평이 우두머리였다.


흑시상지

백제의 장군.660년(의장왕 20) 백제가 망하자 항복했으나,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를 비롯하여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이에 분개하여 임존성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부흥운동군은 곧 3만 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 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당나라가 새로이 원병을 보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자,더 버티기 어려워 당나라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했다. 그 후 당나라로 건너간 흑치상지는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 사가 되어 토번과 돌궐(突厥)을 치는 데 공을 세워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처형됐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