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신라의 달밤-현인///善德女王

bsk5865 2014. 10. 30. 13:22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0.29 06:07

 

신라의 달밤-현인///善德女王(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070 


신라의 달밤-현인


신라의 달밤-현인

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


아 ~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에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 신라의 밤이여
화랑도의 추억이 새롭고 나
푸른 강물 흐르건만 종소리는 그치었네
화려한 천년 사직 간 곳을 더듬으며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워라
대궐 뒤에 숲 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임들의 치맛 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善德女王

다른 이름; 김덕만(金德蔓)

생애와 업적

진평왕이 왕위에 있을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훗날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공주에게 보이자,공주가 이렇게 말했다.

"이 꽃은 매우 아름답기는 하나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웃으며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물었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 ” 벌과 나비가 없으니,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없습니다" 공주의 대답이었다. 꽃씨를 심었더니 과연 향기가 없었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의 기미를 미리 갈아냈다는 지기삼사(知幾三事)’가운데 한 가지이다. 다른 두 이야기는 겨울철에 개구리 떼가 계속해서 울자 서쪽 변방 여근곡(女根谷)에 백제군이 숨어 있음을 알고 이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그리고 자신이 죽을 날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이야기이다.

선덕여왕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알려주는 이 기록들은 왕의 권위를 세우고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것이다. 또 한편,이런 이야기들까지 동원해야 했을 만큼 여왕의 즉위와 통치에 어려움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선덕여왕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김씨 사이의 장녀(차녀라는 기록도 있다)로 태어나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신라 제27대 왕으로 추대 되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왕에게 아들이 없었을 뿐 방계의 남자 왕족들이 있는데도 여자 인 선덕여왕이 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성골과 진골을 비롯해 6두품에서 1두품까지 모두 여덟 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였다. 이를 골품제라고 하는데,이 가운데 성골은 왕의 직계 후손으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특수한 신분을 말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정골 남자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서” 여왕이 즉위했다고 전한다. 성골 남자가 없자 진골 남자 대신 성골 여지를 선택 했다는 것은 신라에서 남녀의 벽보다 신분제의 벽이 더 높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는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선덕여왕과 사촌간인 진덕여왕을 제28대 왕으로 삼았고,다시 신라 말 제51대 왕으로 진성여왕을 선택할 만큼 여성의 정치 참여에 우리 역사의 어느 왕조보다 관대했다. 물론 남자 후계자가 없다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 명의 여왕 이후 우리 역사는 더 이상여성 통치자를 허용하지 앓았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632년)을제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한 뒤 각도에 사신을 파견해 홀아비와 홀어미,그리고 혼자 힘으로 살아 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진 홀했으며,그 이듬해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주는 등 민심을 수습했다.

634년(선덕여왕 3)에는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자주성을 높였다. 또한 이 해에 분황사를 세웠고,이듬해에는 영묘를 세웠다.

선덕여왕은 재위기간 동안 불교에 매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재위15년 동안 25개의 사찰을 창건했고,황룡사 구층탑을 비롯해 신라의 불상과 불탑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한 승려 자장을 등용해 통치 후반에 겪게 되는 어려움을 타파하려 했다. 첨성대를 세운 것도 선덕여왕 대의 일이다.

또한.636년(선덕여왕 5) 서남쪽 변경에 쳐들어온 백제 군사들을 무리쳤고.638년(선덕여왕 7)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크게 이기는 등 제위 전반기에는 대외 전쟁에서 우위를 보였다.

그러나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 이 해에 백제 의자왕의 침략을 받아 서쪽에 있는 40여 성을 빼앗겼으며,당나라와 통하던 길목인 당항성도 고구려 •백제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자신이 직접 전투에 나서지 못하는 약점을 용병술로 극복했다.선덕여왕이 주목한 인물은 김유신과 김춘추였다.당시 신라의 주류세력에게 밀려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던 김유신과 김춘추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공은 선덕여왕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는데,돌아 온 것은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내가 종친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임금을 삼으려”한다는 황당한 대답뿐이었다. 선덕여왕은 이 말에 반발하지 않고 이듬해 사신과 방물을 보내 태종을 달래는 현실주의 노선을 택 했다. 고구려 •백제의 공격을 받고 있는 와중에 당나라까지 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당 태종이 지적한 여왕 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여왕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진골 남성들을 부추기 기에 충분했다. 647년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진골 귀족들은 여광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난은 김춘추 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으나,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숨을 거두어 낭산(狼山)에 묻혔다.


평가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는 선덕여왕 개인의 업적에 관한 것보다 여왕의 통치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재위 시에도 여왕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있었음은 비담의 난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비담은 선덕여왕에게 여주(女主)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여성의 통치에 반발했다. 물론 진평왕 사후“국인(國人)들이 세웠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귀족층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선덕여왕을 지지하는 귀족들도 적지는 않았다.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당이 신라를 공격하자 선덕여왕의 무덤 앞에 사천왕사를 건립하는 등 선덕여왕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당당하게 대처한 여왕의 외교를 높이 평가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말 최치원은 선덕여왕이 많은 승려들을 추천하여 높은 직위를 주었기 때문에 나라의 인재들이 불교에 매달리게 되었다며 여왕의 정치를 비난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자 유교적 명분론으로 무장한 김부식은《삼국사기》에서“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라의 정치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폭언을 퍼부으며 선덕여왕의 즉위 자체에 대해 비난했다.

여왕의 통치에 대한 반발은 조선시대에 더욱 강경해진다. 15세기《동국통감》을 지은 서거정은“천지의 법을 어기고 음양의 이치를 거슬러 암닭이 새벽에 울어 집안이 망하는 화를 열어놓았으니 그 실수가 극심”하다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여왕에 대한 불쾌함을 나타내면서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 세 명의 여왕을 지목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은《동사강목》에서 황룡사 구층 탑을 언급하며 “곡식과 재물을 저축하여 군국의 비용으로 삼았어야 할 것인데,쓸데없는 곳에 다 써버리고 신의 도움만을 바랐으니 슬프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선덕여왕의 불교정책을 비난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선덕여왕은 비록 다른 왕들처럼 말을 타고 전쟁터를 누비지는 못했지만 정확한 판단력과 민첩하고 결단성 있는 인사정책으로 신라통일의 주역이 되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발탁 함으로써 한반도 역사의 판도를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한 지혜로운 왕으로 새롭게 평가 받고 있다.


첨성대

현재 남아 있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근래에 첨성대의 쓰임에 대해 다른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다. 천문대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거나 불교에서 말하는 성스러운 산인 수미산을 본뜬 상징물이라는 주장,또는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었거나 단순히 천문대의 상징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높이가 9미터밖에 안 되는데 과연 그 정도 높이로 천문대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가운데 나 있는 차무도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지나치게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에서 실질적 첨문대라기 보다는 상징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떤 주장이 옳은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어쨌든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첨성대는 크게 세부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각형의 이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 경으로 27단의 돌을 쌓아 올렸으며,꼭대기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인데,이는 음력으로 따진 1년의 날수와 같다. 원주형의 27단과 맨 위 정자 모양의 돌까지 합하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개를 상징한다 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은 12 달 24절기를 의미한다 또한 첨성대 꼭대기의 정자 모양 돌은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이처럼 갖가지 상징과 과학적인 구조를 갖주고 있는 첨성대는 국보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