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류충몽-화금심 작사 조명암 작곡 김해송
一 꽃다운 이팔청춘 눈물이 웬말이며 알뜰한 첫사랑에 이별이 웬말이냐 얼룩진 분단장을 다듬는 얼굴 위에 모질게 짓밟힌 낙화 신세 이름마저 기생이냐 누구의 죄더냐
二 술 취한 사람에게 주정도 받았으며 돈많은 사람에게 괄세도 받았다오 밤늦은 자동차에 지친 몸 담아 싣고 뜨거운 두 빰에 흘린 눈물 천한 것이 기생이냐 직업이 원수다
李資謙 활동분야:정치
생애와 업적 인종은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체포를 명했다. 이제 열여덟의 청년이 된 인종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건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인종이 부왕 예종의 죽음 뒤 이자겸의 보필(輔弼)에 힘입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종이 병상에 누웠을 때 신하들은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던 태자를 대신해 왕의 동생 중 한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 외척의 발호를 막고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는 길이라 판단했다. 반면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들은 태자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세력이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예종은 태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세상을 떠났다. 경원 이씨 가문으로 대표되는 외척들과 신하들이 자신의 아들을 도와 균형을 이뤄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사위 대신 어린 시절부터 길렀던 어린 외손자를 왕위에 앉힌 이자겸은 양 어깨에 날개를 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세 명의 딸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 보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자연의 손자로 태어났던 이자겸이지만 늘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만은 아니다. 순종의 왕비였던 여동생이 순종 사후 간통사건에 연루되면서 파직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왕비의 오빠라는 이유로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올랐다가 파직 된 뒤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채 보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그러다 자신의 둘째 딸을 예종에게 시집 보내면서 다시금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하며 정2품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으나 사실 외척 세력을 견제하며 중립정치를 구현한 예종 대까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이 바뀐 것이다.
인종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을 지지했던 공을 인정해 이자겸을 협모안사공신(協諸安社功臣)으로 높이고 수태사중서령소성후(守太中書令部城侯)에 봉했다. 이후 이자겸의 전횡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린 외손자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왕의 등 뒤에 서서 국정 전반을 주무를 수 있게 된 이자겸은 우선 정적들의 제거에 나섰디.왕의 작은아버지인 대방공 보, 한안인• 문공인 등이 역모를 꾀했다며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다른 성씨에서 왕비가 나오면 권세가 나누어질까 염려하여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연이어 왕비의 자리에 앉혔다. 인종으로서는 두 이모들과 혼인을 한 샘이다.
이러한 강력한 정치력과 강탈, 뇌물을 통해 축적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이자겸은 왕권까지 위협하는 막강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힘을 자제하지 않고 맘껏 휘둘러댔다.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매관매직(賣官賣職)하여 재산을 축적했으며 스스로 국공(國公)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여 전국에서 축하 문을 올리도록 했다. 여기에서 더 나가 스스로 왕의 군국지사(軍國知事)가 되고 싶어 왕에게 자기 집으로 와서 책서를 수여해줄 것을 요청했고,임명식 날짜까지 강압적으로 지정했다. 군국지사가 되겠다는 것은 왕의 권한을 가지고 섭정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막 청년기에 들어선 인종으로서는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외가에서 자라실질적으로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이대로 왕권을 농락당한 채 끌려 다닐 수는 없었다.
1226년 2월 25일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과 오탁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하여 이자겸의 군사적 배경인 척준경의 이들 등을 죽이고 시체를 궁성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소식은 바로 이자겸에게 전해졌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선제공격을 결정하고 척준경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궁성으로 달려갔다. 척준경은 최탁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궁성을 포위했다. 이때 인종이 신봉문(神鳳門) 위에 나타나 무장해제를 명령했으나,아들과 동생의 시체를 본 척준경은 활을 드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궁성에 불을 지른 뒤 빠져 나오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불은 온 궁궐에 번져나갔다. 척준경이 궁성 병력을 모두진압하자 이자겸은 궁성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을 모두 처단했다.
인종은 비록 변란의 와중에서 목숨을 건졌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서둘러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양위 조서를 받은 이자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재종 형 이수가 꾸짖었다.
“비록 성상의 조서가 있다고는 하나 이공이 감히 어찌 그리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이자겸은 신에게 두 마음이 없으니 , 성상께서는 부디 소신의 마음을 알아주소서”라며 조서를 되돌려 보냈다.
와위를 빼앗지는 않았으나 인종을 무력으로 제압한 이자겸의 횡포는 이전보다 한층 더 심해졌다. 이자겸은 자신의 집 서원에 인종을 감금하다 시피 하며 모든 정사를 주관했다 이 무렵 군신 관계를 요구해온 금나라에 대하여 모든 관료들이 반대했는데도 자기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사대정책을 결정한 것도 이자겸이다.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할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이자겸도 이러한 눈치를 모르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와 손자 간이자 장인과 사위간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었다.
이자겸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종을 아예 없애버린 뒤 자신이 왕이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당시 도참설에서 유래된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된다 는 비결을 믿었다. 자신의 성씨인 이(李)씨를 분해하면 십팔자(十八子)가 되니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인종이 거처하는 연경궁(延慶宮) 남쪽에 거처를 마련한 뒤 담을 뚫어 궁궐과 통하도록 하였으며,군기고에 있던 갑옷과 병기를 자신의 집에 두었다. 또한 독이 든 떡을 왕에게 올리기도 하고 왕비에게 독약을 보내 왕에게 먹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왕비의 기지로 인종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인종은 마침내 내의원 최사전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척준경을 이자겸에게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척준경은 윤관과 함께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무장으로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스런 인물이다.
그 동안 이자겸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척준경의 군사력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그 무렵 척준경과 이자겸은 노복들의 하찮은 싸움에서 번진 갈등으로 틈이 벌어져 있었고 인종은 그 틈을 노린 것이다.
인종의 밀지를 받은 척준경은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잡아 가두고,그를 따르는 장수들의 목을 베었다. 척준경의 배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잡혀온 이자겸은 부인 최씨, 아들 이지언과 함께 영광에 유배되었다. 신하들은 그를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으나 인종이 거부하여 유배형에 그쳤다. 이자겸은 몇 달 뒤 귀양지에서 죽었고,신하들의 상소에 따라 인종의 비로 있던 그의 두 딸도 폐위되었다. 문종 대부터 7대 80여 년 동안 최고의 외척 세력으로 큰 권세를 누려왔던 경원 이씨 가문은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한편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오른 척준경도 1년 뒤 이자겸의 난 당시 궁궐을 불태우고 왕에게 활을 쏘았다는 탄핵(彈劾)을 받고 섬으로 유배되었다.
평 가 이자겸이 죽고 난 뒤 3년이 지나자 인종은 외할머니이자 장모인 이자겸의 처 최씨를 개경으로 불렀다. 그러면서 이자겸을 다시 한양공(漢陽公)에 봉하고 최씨를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에 봉해 대우했다. 인종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사관들은 우유부단한 왕이 라고 보기도 하고,원수를 용서하고 덕을 펼친 어진 왕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인종은 3년 만에 이자겸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주었으나 후세의 평가는 지금까지“그 위세와 포학은 말이 아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 그대로이다. 이자겸에 대한 내용은 《고려사》《반역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인종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는 유교적 사관에 근거한 비난뿐 아니라 그러한 반역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라는 점에서 이자겸은 더 많은 점수를 잃고 있다. 당시 고려 사회는 문벌귀족들이 득세하던 시기로 이자겸은 그 가운데 가장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었을 뿐 백성들의 삶은 외면했다.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는 책임에 대해서는 인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듯 민생 외면한채 권력다툼에 빠져든 집권자들로 인해 이후 고려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무신정변,원의 침략으로 이어지는 격변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자겸의 난은 고려 사회 모순 폭발의 시발점이란 할 수 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