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大奥悲恋花-秋山涼子///江島生島事件

bsk5865 2014. 11. 28. 08:38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1.28 06:36

 

大奥悲恋花-秋山涼子///江島生島事件(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297 




大奥悲恋花-秋山涼子

作詞 城山たかし 作曲 松井義久 編曲 地多孝春

とめどなく・・・
なみだこぼれる たれゆえに
ちぢにみだれる こいのため・・・


三宅恋しや 生島さまが
雨も降らせぬ 袖ぬらす
計り知れない 罪償いの
とうに覚悟は 出来てます
あぁ~風に あぁ~花が
絵島悲しい ほんに切なや
散るさくら

セリフ
わたしがここに来ただけて
人目が騒ぐというのも判りませぬ。
何一つお咎(とが)めを受ける様な
事など毛頭ありませぬのに・・・
淫らな女有りもせぬ嘘を撒き散らされ
まさしく陰謀としか考えられませぬ。
貴方様にまで濡れ衣を着せてしまい、
申し訳なく存じます。


芸に身を焦(や)く あなたが眩し
化粧艶めく 優男
褄をとる手の 流れる仕草
何故にこうまで 魅(ひ)かされる
あぁ~恋が あぁ~胸を
絵島泣かせの 恨みつらみの
木挽町(こびきちょう)

セリフ
こうなったうえは御上に楯突く事も
出来ませぬが なんとか手段を考え
貴方様に救いたい一念でござります。
暫くはご勘弁下さりますように・・・
きっといい話になる努力いたしてみますので、
ご赦免の由をただただ心から祈っております。


絵島生島 命火燃やす
浮き名邪魔する この世なら
せめてあの世で 添いとげましょうと
契り交わした 夫婦びな
あぁ~愛を あぁ~夢で
絵島淋しい 一目逢いたい
悲恋花

生島さま~~~~~~~


江島生島事件

江島生島事件(えじまいくしまじけん)은 江戸中期, 大奥마님의 侍女의 絵島와 歌舞伎 俳優의 生島新五郎(いくしましんごろう) 等 多数가 処罰된 風紀粛正事件입니다. 絵島生島事件,絵島 事件으로도 불립니다.

1714年(正徳4年), 江戸城 大奥의 御年寄(おとしより)・江島는 시중을 들고 있는 月光院(げっこういん=江戸幕府 六代将軍 徳川家宣의 側室)의 이름으로 前 将軍・家宣의 省墓 때문에, 宮路 等과 함께 寛永寺,増上寺에 參拜하고. 歸家 途中에 親密하게 지내던 布木商・ 後藤縫殿助의 勸誘로 木挽町(지금의 東銀座,歌舞伎座 周辺)의 演劇 오두막・ 山村座에서 生島의 演劇을 보았습니다.

演劇이 끝난 뒤, 江島는 生島 等을 찻집으로 불러 宴会를 열었지만, 宴會에 熱中해 大奥의 閉門時間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大奥七ツ口의 앞에서, 말이 通하지 않는 입씨름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 일이 江戸城中에 알려져, 評定所(ひょうじょうしょ=近代以前에 訴訟을 取扱했던 機関)의 審理받게 되었습니다.

当時 大奥에는, 現 将軍・家継의 生母・月光院을 中心으로 하는 勢力과 前 将軍・家宣의 正室・天英院을 中心으로 하는 勢力이 있었습니다.

月光院이 家継의 学問 스승인 新井白石(あらいはくせき)나 側用人(そばようにん=江戸幕府의 諸藩에 두었던 職責)의 間部詮房(まなべあきふさ) 等과 親한 사이로, 大奥에서는 月光院側이 優勢했습니다.

이 事件은 天英院側에서는, 勢力을 挽回할 絶好의 機会였습니다. 天英院은 家宣・家継의 根源으로 幕府에 依한 政治를 左之右之하고 있던 新井白石・間部詮房를 쫓아버리기 爲해, 代代로 이어온 領主(関ヶ原の戦い 以前부터 徳川氏의 家臣)나 5代将軍・綱吉時代부터의 老中(ろうじゅう=江戸幕府에서 藩의 職名)들이 이 事件을 画策했다고 하는 説이 있습니다.

評定所에 依해서 関係者가 徹底하게 照査되고 그것에 依해 大奥의 規律이 解弛해 짐이 次例次例로 밝혀졌습니다. 江島와 生島와의 密会를 疑心을 두고 評定所에서 내려진 裁決인 죽음을 한 段階을 줄인 落島로 流配하고, 隊長을 지키던 武士인 江島의 遊興相對가 된 生島에게는 武士 礼에 準據한 割腹 自殺이 아니고 斬首를, 男同生은 무거운 追放이 되었습니다.

月光院의 嘆願에 依해, 江島에 對하여는 한 段階 減刑되여 高遠藩으로 流配되었습니다만, 事実上의 流罪였습니다.

江島의 遊興相對인 生島는 三宅島(みやけじま)로 流配되고, 江戶時代 歌舞伎座인 山村座는 廃座됩니다.이 連累로 인해 歌舞伎座는 簡素한 構造로 改築을 命 받아 저녁의 営業도 禁止되었습니다.

이와, 둘러싼 利權을 쥐고 있던 大奥御殿医의 奥山交竹院과 그 男同生의 水戸藩士, 幕府呉服師의 後藤와 그 手代(てだい=江戸時代 中期 以後에 農政을 担当했던 下級役人), 또 材木商 等도 落島로 追放의 處分을 받는 等, 大奥의 風紀粛正을 爲해서 多數의 連座者가 나왔습니다. 最終的으로 1500 余名의 사람들이 處罰되었다고 합니다.

이 事件으로 天英院側이 優勢해지고, 2年 後인 1716年(正徳6年)에 家継가 끈어 지면서, 天英院이 헤아리고 있던 紀州의 徳川吉宗가 다음의 将軍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事件이 将軍 決定을 둘러싼 謀略이라는 見解도 있지만, 幕府를 左之右之하고 있던 白石・詮房를 追放하기 爲해서 天英院과 여러 大名과 老中이 꾸며낸 스캔들이라는 說도 있습니다.

이 事件에 對해서, 明治 以後, 演劇의 上演 目錄으로 다루어지게 됩니다. 또 1953年(昭和28年), 東京新聞에 連載된 舟橋聖一(ふなはしせいいち=1904年 東京生 日本의 小説家)의 小説 「絵島生島」가 거리에서 좋은 評判을 받아, 事件의 全貌가 世上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小說은 脚本化되어 歌舞伎座에서도 上演되게 되었습니다. (この歌舞伎や多くの芝居物では、江島が生島を大奥に連れ込んで情事に及んだ事になっているが、それはあくまで脚色で事実ではないとされている).以後, 많은 小說家가 이 事件을 테마로 小說을 執筆, 또 그 밖에도 긴 民謠로 읊어지거나 最近에는 映畵나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