こぼれ花-石原裕次郎 作詞 萩原四朗 作曲 上原賢六
一 紅い 野薔薇が ただひとつ 荒野の隅に 咲いている ものみな枯れた 山かげに 風に震えて 咲いている
二 ちょうど去年の いま頃か 泣くなと言えば なお泣いた あの娘の帯に バラひとつ 咲いていたのを 憶いだす
三 寒い夕陽が 落ちたとて 荒野の薔薇よ 散るじゃない お前も俺も こぼれ花 おなじさだめの こぼれ花
四 紅い 野薔薇が ただひとつ 荒野の隅に 咲いている ものみな枯れた 山かげに 風に震えて 咲いている
文化遺産見学記(日本編) 지난 11월 12일(수)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건국대학교 새천년 관에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완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1권 규슈를 시작으로 2권 아스카•나라,3권 교토의 역사,4권 교토의 명소 등 총4권으로 이뤄진『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은 유흥준 교수가 틈틈이 일본을 찾으며 그곳에 남아있는 한국 도래인 들의 문화를 더듬어간 발자취라 할 수 있다.
일본편 4권의 표지를 넘기면‘茶道云 和敬清寂 온화하게,공경스럽게,맑게,고요하게.’라는 글귀가 손 글씨로 적혀 있다. 이 말은 센노리큐(千利休)가 정립한 일본 다도의 정신을 번역한 것으로 한국과 일본이 뒤엉킨 문제를 현명히 해결하여 동아시아문화창조의 동반자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지은이의 뜻이 담겨 있다.
“일본의 문화유산을 살펴 보며 우리 것을 비교하면서,우리에 관해서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며 시작된 이번 강연은 4권에 수록된 내용뿐 아니라 일본의 고대 역사와 한반도 도래인 미술 불교 등 일본 편 전반을 아우르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약속됐던 한 시간 반을 훌쩍 넘어 두 시간을 꽉 채웠지만 그래도 시간이 모자랐던 탓에 후반부는 사진과 함께 짧은 설명을 덧붙이는 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유홍준 교수는“일본과의 교류는 2.300여 년 전부터 이어져 왔는데 사이가 틀어졌던 것은 임진왜란 7년과 일제 강점기 35년뿐이다. 과거 선조들의 문제 해결 방식을 되짚어보면 지금의 한일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며“내년이면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는데 일본을 제대로 알고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우리의 요구를 내세워야 그들도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다. 내년이 오기 전에 끝내야겠다는 일념 하에 2년 만에 4권의 책을 완성하느라 너무 힘들었다"는 농담 아닌 농담과 함께 강의를 마쳤다.
유홍준 교수의 당부처럼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무엇을 해 줬는지,어떤 영향을 줬는지 만 내세우기보다는 앞으로의 바람직한 한일 관계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日本の歴史の流れを歩きながら、調べる、韓半島の渡来人の影響
吉野ヶ里 弥生時代(기원전 300~300년) 세계적으로 청동기 시대의 취락 지역은 현재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 흔적을 발견하기가 어려운데 2,300년 전 한반도의 민무늬 토기(청동기)를 시용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거대한 취락의 흔적이 규슈(九州) 사가현(佐賀県) 요시노가리에서 발견되었다(당시 일본은 야요이 토기 사용). 몇 십만 평이나 되는 대지에 5,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던 곳이 어쩐 일인지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20세기에 공사를 하려고 땅을 파다 발견되어 공장건설을 포기하고 복원하게 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곳 입구의 기둥 위에는 새가 앉아 있는 모형이 있는데 일본의 신사입구에 세워져 있는 도리이(鳥居)의 유래가 되었다.
大仙陵古墳(仁德王陵) 古墳時代(300~550년) 한반도에서 가야가 쇠락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오시카(大阪)의 사카이(堺),이즈미(泉) 지역에 정착하였고 자연스럽게 가야의 토기와 철기 문화가 이 지역으로 흡수되며 전방후원분이라는 고분시대가 열렸다.
이곳의 미스터리가 바로 거대한 인덕왕릉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도 바닥 면적이 넓다(약400X500m). 여기서 나온 유물 중에 상징적인 것이 철기 즉,가야 문화인데 당시 일본은 아직 고대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런 고분을 만든 것을 보면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들 일본은 축소 지향이라고 하지만 극대와 극소를 지향하는 일본인 들의 특성이 잘 나타난 유적이다.
法隆寺 飛鳥時代(550~700년) 백제 도래인 인 소가(蘇我) 씨는 지금의 나라(奈良) 지역인 아스카에 터전을 마련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최초로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번창시키며 고대 국기를 형성했고 나라에 세워진 법륭시는 고대 일본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 소가씨가 쇼토쿠태자의 수뇌부 역할을 하며 크게 활약했다.
법륭사에는 백제인의 건축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특히 이곳에 있는‘백제관음상(목조)’은 일본 한국 미술사에서 모두 도래 불상이라 부른다. 9등신의 비례에 물에서 니와 옷이 달라붙어 몸의 실루엣이 아 름답게 비치는 듯한 선이 고고해 보인다고 하여 중국에서는 출수(出水) 의 모양이라고 한다. 유홍준 교수는 개인적으로 이 불상을 보려고 법륭시를 찾는데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들뜬다고.
広隆寺 飛鳥時代(550~700년) 교토(京都)의 가쓰라가와(桂川) 주변은 엄청난 습지여서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신라계 도래인 하타(秦) 씨들이 백제계 도래인을 피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들은 탬을 만들어서 습지를 농지로 바꾸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중 진하승(秦河勝. 하타노 카와카쓰)이란 시람이 리더 역할을 했으며 이 사람은 후에 쇼토쿠 태자 밑에서 재무재상까지 역임한다.
이 진히승이 광륭시를 건립했는데 이곳에 신라에서 보내준‘목조미륙반가사 유상(일본의 국보 제1호)’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불상을 보고“고대 그리스 신의 조각과 로마 시대에 만든 수많은 기독교 예술품은 아직 인간적인 냄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불상은 모든 시간 적인 속박을 초월해서 이뤄낸 인간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라며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伏見稲荷大社 奈良時代(700~800년) 한반도 도래인 들은 매니지먼트에도 뛰어나 신시를 관리하면서 온갖 신들을 모셨다(일본의 신시는 신사 안에 딸린 신사를 만들어 다양한 신을 모시고 다른 신사에서 그 신시를 떼 가서 모시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교토에 있는 후시미 이나리타이샤이다.
후시미 이나리타이샤는 원래 하타 씨들의 주관으로 농사의 신을 모시던 신사였는데(‘이나(稲)’는‘벼’라는 뜻) 언젠가부터 사업번창의 신을 함께 모셨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업이 발달하자 많은 신사들이 이곳에서 이나리 신사를 떼가모시기 시작했다. 소위 프랜차이즈산업처럼 전국에 약4만 개의 이나리 신사가 생겨났다. 그리고 사업번창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곳 에 도리이를 바치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수의 도리이가 세워져 그 길이가 약 4km에 달하게 되었고 지금은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명물이 되었다.
清水寺 奈良時代(700~800년) 교토 관광객의 70%가 들른다는 청수사. 이곳을 세운 시람도 백제계 도래인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라고 전해진다. 사가노우에노는 일본 최초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을 지내기도 했다.
청수사에는 이분의 사당이 있는데 유홍준 교수는“처음에 초상화를 보고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일본인스러워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이 분은 백제계 도래인 5세로 선조의 뿌리가 백제였을 뿐 일본 땅에서 일본인으로서 살았던 것"이라며 “한국인들은 우리가 뭔가를 해줬다는 의식을 버리고 그들의 우수한 점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