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열차-남인수///崔茂宣(D)|★....演歌 게시판
무정열차-남인수 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
一 밤차는 가자고 소리 소리 기적소리 우는데 옷소매 잡고서 그 님은 몸부림을 치는구나 정 두고 어이 가리 애처로운 이별 길 낙동강 굽이굽이 물새만 운다 눈물 어린 경부선
二 떠나는 가슴에 눈물 눈물 서린 눈물 고일 때 새파란 시그널 불빛도 애처로운 이 한밤아 마지막 인사마저 목이 메어 못할 때 쌍가닥 철길 위에 밤비만 젖네 울고 가는 경부선
三 아득한 추풍령 고개 고개 눈물고개 넘을 때 희미한 차창에 그 얼굴 떠오르네 비치네 기차도 애처롭게 허덕지덕 달릴 때 새빨간 님의 순정 가슴에 젖네 비 내리는 경부선
崔茂宣
활동분야; 과학
생애와 업적 북쪽에서는 홍건적의 침입으로,그리고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려 말. 예성강 입구에 있는 벽란도에 거의 매일이다시피 나타나 중국 상인들을 붙잡고 뭔가 열심히 물어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벽란도는 당시 중국의 상선(商船)들이 드나들던 고려의 대표적인 무역항이다. 중국의 상선이 들어올 때마다 기웃거리며 그 남자는 염초(焰硝) 만드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1372년 어느 날 그는 원나라에서 온 이원이라는 사람을 만난다.이원이 염초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고 했다. 남자는 그를 자기 마을에 살게 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그렇게 공들인 지 한 달여 만에 드디어 염초 만드는 비법을 배울 수 있었다. 염초는 화약 제조의 핵심 원료로서,그 화학성분은 질산칼륨이다. 이 질산칼륨에 열을 가하면 대량의 산소가 발생하여 유황과 숭을 폭발적으로 연소시킨다. 명나라와 원나라에서는 이미 화약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제조방법은 극비 사항이었다.
어릴 때부터 경서(經書) 공부보다 병서(兵書) 읽기를 즐겼고 무기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이 남자, 최무선은 남해와 서해에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물리칠 방법을 찾던 중 화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비를 들여가며 연구를 하고 실험을 했다. 정부의 도움은커녕 후원자도 없었다. 먼저 화약을 만들려면 세 가지 재료,초석(硝石). 유황•염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초석과 유황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를 만드는 것이 문제였다. 몇 년에 걸쳐 온갖 노력을 해보았으나 실패만 계속될 뿐이었다. 결국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벽란도에 나가 염초 제작 기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했던 것이다.
이원에게 염초 만드는 법을 배운 최무선은 얼마 뒤 화약의 제조에 성공했다. 일꾼을 시켜 실험해보니 성능도 아주 좋았다.
최무선은 “왜구를 막을 화약을 만들었다”고 나라에 알리고 본격적으로 화약을 제조할 기구를 설치해달라고 건의했다. 그 무렵 왜구들은 강화도까지 침범해 개경 사람들을 위협했다. 처음에는 최무선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던 조정이었지만 끈질긴 건의에 우왕은 화통도감(火㷁都監)의 설치를 허락했다• 1377년 10월의 일이다.
화통도감의 책임자가된 최무선은부지런히 화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화얻별 이용하는 선무기들을 발명해냈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화기들은 모두 열여덟 가지가 전하는데, 그 중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육화석포(六火石抱).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등은 총포의 종류이고,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해統)은 발사물이며,그 외에도 질려포(疾藜砲).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荐山五龍箭). 유화(流火). 촉천화(觸天火). 주화(走火)가 있다. 이 가운데 특히‘날아가는 불’이라는 뜻의 주회는 얼핏 보면 화살과 비슷하지만,통 안에 있는 화약을 태워 그 추진력으로 날아가는 원리가 로켓의 원리와 똑같다. 고려시대에 로켓을 만든 것이다.
최무선은 1378년 조정에 다시 건의하여 이 무기를 사용할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라는 포병부대를 만들었다. 이제 왜구가 육지에 접근하면 일제히 공격하여 적의 배를 불태울 준비는 끝났지만,도망치는 적선을 잡기 위해서는 군함이 필요했다. 목선밖에 없던 당시의 조선 기술로는 무거운 화포나 많은 포탄을 실을 경우 배가 침몰해버리는 형편이었다. 그는 다시 연구를 거듭하여 무거운 중량에 잘 견디고 진동에도 문제가 없는 우수한 전함을 만들었다. 이 군함에는 화약에 습기가 차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화포로 무장한 100척의 함선과 화약 무기에 정통한 3,000명의 수군부대가 갖춰졌다.
이러한 준비가 진행된 지 3년째 되던 해,왜구의 배가 진포(鎭浦)로 몰려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화약 무기를 시험해 볼 기회라 생각하고 최무선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했다. 최무선이 금강 입구에 도착해보니 왜구들은 밧줄로 배를 서로 묶어둔 채 육지로 올라와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불화잘이 천지를 흔들며 왜구의 배를 향해 날아갔다. 묶여 있던 왜선들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거의 다 불에 타버렸다. 왜구들은 배와 함께 불타죽기도 하고 바닷속에 빠져 죽기도 했다. 육지에 올라왔던 왜구들은 지리산에 숨어 말썽을 피웠으나 이성계가 황산에서 섬멸(殲滅)했다. 이 전투가 황산대첩이다.
《태조실록》은 “이로부터 왜구들이 사라졌다. 항복을 비는 자들이 연이었고,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예전의 생업으로 돌아갔다. 오직 임금(이성계)의 덕을 하늘이 응해준 소치이나 최무선의 공도 오지 않았다”라고 하여 이성계의 활약상을 기록하며 최무선의 공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우왕은 개선식을 열어주었다. 또한 최무선의 벼슬을 문하부사(門下府事)로 높여주고 영성군(永城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재상의 반열에 올려준 것이다.
그 뒤 움직임이 뜸하던 왜구는 3년 뒤 20여 척의 배에 2,406명이 나뉘 타고 남해의 관음포에 다시 등장했다. 최무선은 이미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나 몸소 출전하여 다시 왜구를 몰아냈다 이후 왜구는 남해안이나 서해안에 다시 나타나지 못했다.
고려는 왜구의 뿌리를 뽑기 위해 1389년 박위에게 100척의 함선를 주고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토벌케 하였다. 박위는 쓰시마의 왜선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왜구를 섬멸했다. 그 해 멀리 류구왕이 신하의 예를 갖추어 고려로 사신을 보내왔고,일본 서부의 영주들이 줄이어 고려에 예를 갖춘 사신을 보내온 것은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무장한 고려 수군의 위력 덕분이다.
최무선은 6년쯤 더 벼슬자리에 머물렀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잡은 뒤 조준은 왜구가 더 이상 침입하지 않으니 경비 절약을 위해 화통도감을 폐지하여 군기감에 통합해야 한다고 건의 했다.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졌고 최무선도 그 무렵 조정에서 물러 나왔다. 화약의 제조가 줄어들었고 기술 개발이 중지됐다.
무엇보다 화약 제조법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던 최무선은 은퇴 후 집안에 틀어박혀 화약 만드는 법,사용하는 법을 기록하여 책으로 엮었다. 《화약수련법》이라는 책이다 그리고 화포로 왜구를 격퇴하는 장면을 그려 〈화포섬적도〉라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이성계는 최무선의 공을 잊지 않고 명예직을 주었다. 나이가 많아 실직을 줄 수는 없었다. 병이 깊어 자리에 누운 최무선은 아내를 불렀다.
“아이가 자라면 이 책을 주어 익히게 하시오. 그때까지 부인이 은밀한 곳에 간직해두시오"
그의 임종 당시 열 살에 불과하던 이들 최해산이 열다섯이 되어 글을 익히자 아내는 이 책을 꺼내주짝다 아버지가 평생 연구한 자료를 얻은 최해산은 화약 제조와 응용법을 익혀 스무 살의 나이에 조정에 나와 아버지의 가업을 이었다.
평 가 1400년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즉위 후,권근이 글을 올렸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과 문익점의 아들 문중용에게 특별히 벼슬을 주어 아버지들의 공로에 보답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태종은 이들의 공을 인정했다. 최해산에게 벼슬을 주었고, 그의 책임 아래 화약과 화기를 만들었다. 세종도 최해산의 화약 기술을 높이 사, 쓰시마 정벌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당시 조선의 화약 기술은 중국을 능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화약 기술은 15세기 중엽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첨단 로켓 무기였던 신기전(神機箭)과 공수 전환에 탁월했던 이동식 다연발 발사대였던 화차(火車)의 개발로 이어졌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