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姬-市川由紀乃 作詞 木下龍太郞 作曲 岡 千秋
一 明日か今日か 落城は 上る火の手の 大手門 徳川方へ 戻れとは 嬉しいけれど 罪なこと 秀頼様の 妻として 千は 千は 千は死にとうございます ああ ああ ああ
二 お家のための 人形とは 哀し過ぎます あまりにも 涙と 共に 豊臣へ 嫁いだ頃は 幼な妻 難波の城で 愛を知り 千は 千は 千は女になりました ああ ああ ああ
三 時世の風に 桐ひと葉 落ちる天下の 天守閣 この身はお供 叶わぬが こころは固い 二世の縁 秀頼様と 次の世も 千は 千は 千は添いとうございます ああ ああ ああ
Travel spot 日本で最も美しい城、姫路城 一 兵庫県은 아름다운 港口와 차이나타운이 있는 神戸市로 有名하지만, 日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0(ひめじじょう)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數많은 城들이 戰亂을 겪으면서 破壞되었지만, 姫路城은 지금도 原來 모습 그대로 保存되어 1993年,奈良의 法隆寺(ほうりゅうじ)와 함께 日本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 世系文化遺産으로 登錄되어 世界的으로 높은 評價를 받고 있습니다.
姫路城은 하얀 外壁과 마치 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지붕의 曲線 때문에 白鷺城(しらさぎじょう)라는 別名으로도 有名한데, 大天守(だいてんしゅ)와 세 個의 子天守(こてんしゅ)가 連結되어 있는 獨特한 構造와 要塞로서의 機能, 保存 狀態 等이 認定받아 8棟의 建物이 國寶,74棟의 建物이 重要文化財로 指定되어 있습니다.
사실 姫路城은 関西地方 旅行者들에게 鷄肋 같은 存在입니다. 大阪、京都、神戸 等 主要都市와 떨어져 있는데다, 周邊에 特別한 觀光地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먼 길을 달려간 보람이 있는 곳이라는 것만은 分明한 곳입니다.
姫路城のいろいろ 姫路城은 1333年 赤松則村(あかまつのりむら)가 짓기 始作해 1580年에는 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에게 獻上되어 天守를 갖춘 本格的인 城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後,1601年 池田輝政(いけだてるまさ)가 天守를 다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現在는 城 안에 있는 防禦用 웅덩이인 垓子의 안쪽만을 가리키지만 原來는 姫山(ひめやま) 기슭을 基点으로 市街地를 둘러싼 엄청난 規模였다고 합니다.
姫路城은 波瀾萬丈한 人生을 산 千姫(せんひめ) 의 이야기로 有名합니다. 徳川家康(とくがわいえやす)의 孫女인 千姫는 7살에 豊臣秀吉의 아들 秀賴(ひでより)와 結婚해 大阪城에서 살았는데, 徳川 家門과 豊臣 家門이 衝突한 大阪 戦闘에서 男便을 잃고, 以後 再婚한 男便인 本田忠刻(ほんだただとき)를 따라 姫路城으로 거처를 옮기지만 아들과 男便이 잇달아 죽자 佛敎에 歸依해 餘生을 마쳤다고 합니다. 姫路城 곳 곳에는 그女를 爲해 지어진 建物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便 明治時代에 들어와 廢城令이 내려지면서 數많은 城들이 破壞되었는데,姫路城도 競買에 붙여져 23円 50錢(約 10万 円) 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落札者는 城의 古鐵과 기와가 目的이었다고 하는데 維持費가 많이 들고 解體 作業도 힘들어 權利를 抛棄했다는 逸話가 있습니다.
姫路城은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唯一한 城이지만, 오랜 復元 工事 끝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1956年부터 進行된 昭和의 修理에서는 8年 동안 5億 5千万 円을 들여 大千守를 解體해 다시 組立했으며, 올해부터는 補强工事가 始作되어 當分間(2011年~2014年) 大天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어려울 展望입니다.
姫路城은 規模가 크고 볼거리가 많아 主要 建物을 둘러보는 데만 1時間 半 程度가 所要되며, 季節마다 多樣한 이벤트가 開催되어 四季節 모두 人氣가 높은 觀光地입니다. 봄에는 벚꽃 名所로 有名하고 벚꽃이 진 後에는 約 80種 2000그루의 牡丹이 피어나 姫路城을 華麗하게 물들이고 가을에는 丹楓과 함께 多樣한 品種의 菊花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季節에 따라 夜間에 姫路色 照明이 天守를 아름답게 비춰줍니다. 城을 비추는 照明의 色도 달라지는데 봄과 여름에는 白色系列,가을과 겨울에는 따뜻한 느낌의 오렌지색 조명이 天守를 아름답게 비춰줍니다. 近處에는 서로 다른 9個의 庭園이 모여 있는 好個園(こうこえん) 等도 있습니다. 姫路城の構造 姬路城의 通路는 迷路처럼 좁고 구불구불하고 天守閣까지 바로 이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 特徵입니다. 이것은 敵을 分散시키고 막다른 곳으로 몰아 攻擊하기 爲한 構造라고 합니다.
또한 防禦를 爲한 多樣한 궁리가 되어 있는데. 案內圖를 보면 菱の門(ひしのもん)에서 いの門(いのもん) ろの門(ろのもん) ,はの門(はのもん)의 順序로 가면 天守閣으로 가는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實은 菱の門에서 오른쪽 石壁에 숨겨진 るの門(るのもん)으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또한 天守에 가기 前에 지나는 마지막 門인 ほの門(ほのもん)을 지난 以後에도 天守를 한 바퀴 돌아야만 大天守에 다다를 수 있는 무척 複雜한 構造로 되어있습니다. 天 守 姬路城의 天守는 江戶時代의 모습을 간직한 天守 中 最大 規模를 자랑하는데, 大天守 外에 東(ひがし), 西(にし), 北西쪽의 いぬい(乾)의 세 個의 小天守를 配置한 ‘聯立式 天守’입니다.
壁 全體가 회 반죽으로 칠해져 있어 불에 强하고, 아름다운 曲線의 지붕은 荷重을 分散시키는 構造로 되어 있습니다. 地下1層 • 地上6層 規模의 大天守는 높이만 30 미터로 當時 最高의 技術이 動員된 建築物입니다.
內部에는 化粧室이나 부엌, 작은 房과 武器庫가 있었으며, 지금은 當時의 武器나 歷史 資料들이 展示되어 있습니다. 大天守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階段을 올라가며 觀覽하는데 階段의 傾斜가 만 만치 않습니다. 힘겹게 6層까지 오르면 窓 밖으로 펼쳐 지는 姬路의 멋진 風景을 볼 수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