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獄花-石原裕次郎 作曲 上原賢六 作詞 萩原四朗 台詞 浅丘ルリ子
一 俺たちに 明日はない あるのは ひかる瞳 地獄の 瞳 放さないと ああ燃えてる瞳
セリフ 『愛しあって仕舞った者を、他人がどう見ようと それは勝手です。貴方は地獄を見たとおっしゃる。 そんな地獄が怖いのですか。誰も二人の世界に は入ってこれないんですよ。じっとこうしている 限り、怖い世界など来るものですか。怖いのは、 貴方があたしを裏切った時だけです……。』
二 お前だけ 愛してる 賭けるぜ 命ひとつ ここまで 来たら あとがないさ ああ帰りはないさ
セリフ 『ほんとですね…… あたしだけと…… 最後ま で言って下さるのね……ああ……嬉しい…… さあ、今ここで…… あたしを抱いて!』
三 太陽も 逝く春も 砕けて 散ってしまえ 地獄が なんだ 滅びるのが ああこの世がなんだ
日本公使를 호통친 소금장수 김두원 咸鏡南道 元山港에 居하는 소금장수 김두원씨가 소금 값 5萬1919원을 推尋할 次로 昨年 겨울에 桂太郎(かつらたろう) 日本 總理와 曾禰(そね) 統監과 衆議院 議長에 長書를 提呈하였다는데 지금까지 어떠한 措置도 없으므로 本月 7日에 또 長書와 證據 되는 新聞을 同封하여 桂 總理와 曾禰 統監과 衆議院 議長으로 보내고 소금 값을 속히 보내라고 督促하였다더라.'(大韓每日申報, 1910.3.15.)
김두원은 日本 政府에 소금 값을 물어내라고 執拗하게 歎願해 韓國은 勿論 日本에까지 이름을 떨쳤습니다. 東海岸 一帶를 오가며 소금을 都賣하던 그는 1899年 島根県에 사는 木村源一郞(きむらげんいちろう) 兄弟에게 소금 1088섬을 窃取 當했습니다. 木村 兄弟는 鬱陵島에 소금 값이 暴騰했다고 김두원을 꾀어 그의 소금을 배에 싣고 鬱陵島에 가서 그가 먼저 下船한 틈을 타 소금을 실은 채 사라졌습니다. 그 後 김두원은 韓國 政府와 日本公使館에 歎願書를 提出했습니다. 外部大臣 朴齊純은 日本公使 林權助(はやしごんすけ)에게 眞相照査를 要請했습니다.
林는 韓國 政府에 "木村 兄弟는 司法 處理돼 懲役을 살고 있고, 그들이 隱匿한 財産은 發見할 수 없다며. 相續人은 失業者인 데다 너무 가난해 소금 값을 물어낼 形便이 못 된다"고 遺憾을 表하고, 김두원에게는 '救恤金' 名目으로 몇 百원을 支給하겠다고 通報했습니다. 그러나 김두원은 소금 값을 모두 받아야겠다며 救恤金 受取를 拒否했습니다.
日本人에게 소금을 窃取 當했다고 해서 日本 政府에 소금 값을 물어내라고 要求하는 것은 法的으로는 根據가 未洽할지 몰라도, 김두원은 나름대로 名分이 있었습니다. 그 빌미는 다름 아닌 日本이 提供했습니다. 김두원은 歎願書에 具體的인 事例를 適示했습니다.
日本 帆船이 우리나라 홍주군 장고도 바윗돌에 부딪혀 破船된 것을 그 바윗돌이 우리나라 것이라 하여 賠償金 3000환을 우리 政府에서 받아가고, 또 公州郡에서 留連(客地에 머묾)하던 日本人이 우리나라 軍人과 是非를 하다가 毆打를 當하였다고 治療費 5000환을 우리나라 政府에서 받아갔으니 이 前例와 같이 本人의 소금 값도 日本 政府에서 물어내는 것이 當然한 일이다."('신보', 1910.3.20.)
1903年 김두원은 日本 公使館 正門 앞에서 人力車를 타고 가는 林를 만나 "네가 무슨 日本을 代表하는 公使냐? 너희 나라는 百姓의 도둑질을 그렇게 다스리느냐? 그러고도 東洋의 一等國家라고 자랑하느냐?" 며 人力車를 쓰러뜨려 林에게 가벼운 負傷을 입혔습니다. 乙巳勒約 直後 朴齊純을 만나서는 "지금 서울에 호랑이가 없거늘 무엇이 무서워 총칼을 찬 日本人 憲兵과 巡査를 앞뒤에 護衛하고 다니느냐. 나라의 大臣으로 百姓의 生命과 財産을 保護할 생각이 없고, 단지 妓生과 風樂으로 虛送하면서 公然히 月給만 축내느냐?"며 꾸짖었습니다.
1920年 以後까지 김두원은 執拗하게 日本 政府에 소금 값을 물어내라고 歎願했고, 그 때문에 拘禁 流配되기를 거듭했습니다. 그가 소금 값을 받았다는 記錄은 없으나. 하지만 그는 日本人과 親日派들에게 韓國人의 氣槪와 끈기를 보여주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