純愛の白い砂-本間千代子 作詞 作曲 米山正夫
一 よるべない 流木の やがていつかは 辿りつく ああ 純愛の白い砂 あなただけを あなただけを 求めつつ・・・・・
二 流されて さまよって 水に濡れてる 冷たさよ ああ 純愛の白い砂 何時の日にか 何時の日にか 逢う時も・・・・・
三 雨も去り 風もやみ 虹がかがやく その下に ああ 純愛の白い砂 砂の上に 砂の上に 息絶えて・・・・
얄팍한 속임수의 慈惠醫院 民心 懷柔 얄팍한 속임수의 慈惠醫院 民心 懷柔 晋州에서 創刊된 우리나라 最初의 地方新聞 慶南日報는 1910年 12月 1日字에 이런 記事가 실렸습니다.
"晋州 涉川面 藥洞 居 김인규씨의 妻는 解産의 時期를 臨하야 服中 아이가 거꾸로 앉은 지라 10余 日을 生産치 못하고 死境에 臨迫한 것을 當地 慈惠醫院 醫員 모리아이(盛合綏之)씨가 몸소 往診하야 神妙한 機械로써 施術함에 卽時 順産 生男하야 産婦와 아이가 함께 回生함을 得 한지라, 金氏는 歡感하야 本社에 來하야 널리 알릴 것을 請함으로, 記載하여 一般 人民에게 慈惠醫院의 神奇한 功效를 알리노니, 疾病으로 辛苦하는 者는 一切 該院에 來問하면 貧寒한 者는 無代金으로 藥材를 惠施하야 安全 히 治療케 할지니 各處 人民은 注意함이 可하다더라."
濟衆院(1885)부터 大韓議院(1907)까지 開港 以後 設立된 國家醫療機關은 서울에 集中돼 있었습니다. 1909年 12月 全州•淸州•咸興 세 곳에 設立된 慈惠醫院은 地方에 設立된 最初의 國立病院이었습니다. 세 病院이 成功하자, 强制倂合 前後 水原 •公州•光州•大邱•春川 等 全國 13道에 한 곳씩으로 擴大되었습니다. 設立의 名分은 '從來 醫療機關이 없어서 苦生한 地方 人民에게 治療의 便宜를 提供하고, 特히 窮民 患者에 對해서 施療 救療하는 것은 民心의 融和에 補益하는 바가 적지 않다'(朝鮮總督府月報' 1911. 9.)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統監府와 日本 韓國駐箚軍의 理解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1909秊 前後 無慈悲한 彈壓으로 義兵運動이 잦아들면서 日本의 韓國駐箚軍은 軍醫가 남아돌았고, 倉庫에는 醫療器材가 쌓여있었습니다. 이를 活用해 韓國의 地方 民心을 잡고자 한 妙手가 慈惠醫院 設立이었습니다. 設立 意圖가 무엇이었건, 新式 病院은 醫療 惠澤을 못 보던 地方 民衆들에게 爆發的인 人氣를 끌었습니다.
1909年 12月부터 19個月間 慈惠醫院의 診療者 數는 18万6328名이었는데, 이 中 韓國人이 15万7759名, 日本人이 2万8471名이었습니다. 또 韓國人 患者의 98%가 無料 診療를 받았음에 反해, 日本人 患者의 4%만이 無料 惠澤을 보았습니다. 日本은 無料 治療를 받은 韓國人들에게서 感想文을 받아 報道하여 植民地化의 正當性을 弘報하는 데 利用했습니다.
1910年代 中半 以後 慈惠醫院이 道立病院으로 轉換되면서 有料化되자, 韓國人 患者는 激減했습니다. 1911年 慈惠醫院(13個所) 韓國人 患者는 18万6956名에 達했지만, 1930年 道立病院(31個所)의 韓國人 患者는 13万4575名으로 오히려 5万2000余 名 줄었습니다. 같은 期間 日本人 患者는 3倍 以上 늘었습니다. 全體 人口의 97.1%에 達하는 韓國人보다 2.4%밖에 되지 않는 日本人의 道立病院 利用이 더 많아졌습니다. 强制倂合 當日 "各 道에 慈惠醫院을 增設해 名醫를 設置하고 洋藥을 具備하여 널리 起死回生의 仁術을 받게 될 것"이라던 寺内正毅의 約束은 단지 몇 年 동안의 속임수일 뿐이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