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본 내 고향-남백송 작사 박두환 작곡 김기태
一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二 고향을 떠나온 지 몇몇 해던가 타관 땅 돌고 돌아 헤 메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李光洙와洪命憙
李光洙 생몰년도: 1892년(고종 29)-? 호: 춘원(春園)/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 활동분야; 문학,언론 다른 이름: 이보경(李寶鏡)
共命熹
생몰년도: 1899년(고종 36)-? 호; 가인(可人)/벽초(碧初) 활동 분야; 문학,언론,사회운동,정치
흔히들 20세기 초 조선의 삼대 천재로 최남선, 이광수,홍명희를 꼽는다.식민지시대를 대표하는 이들 3인의 작가들은 비슷한 시기 도쿄 유학을 하며 함께 문학 서적을 읽고 교유했다.또 문일평 등과 함께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지《소년》을 발행하면서 시 • 소설 • 문학론 등을 쓰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이광수와 홍명희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상하이에서 만나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쓰며 함께 문학과 시국을 논하기도 할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친일과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그 차이를 찾기도 한다.
이광수는 1892년(고종 29)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여덟 살 무렵에 《사략》.《대학》.《중용》.《맹지》 등을 읽어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더구나 열한 살때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 친척집을 전전해야 했다. 그런 그가 일본 유학 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동학에 입도했다가 일진회 유학생으로 선발된 덕분이었다.
반면,홍명희는 한국 근대 작가들 중 드물게 최상층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사대부가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888년(고종25) 충북 괴산에서 명문 풍산 홍씨의 장손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당파상 노론에 속하던 명문 사대부 가문으로 증조부,조부 모두 정2품의 벼슬을 했고,아버지도 금산 군수를 역임한 권세 가였다. 그러나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의기(義氣)를 중히 여기는 집안이었다. 그 중에서도 홍명희의 아버지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제일 먼저 자결할 정도로 지조를 목숨보다 중히 생각한 인물이었다. 나라를 되찾고 친일하지 말 것을 유서로 남긴 아버지의 뜻을 홍명희는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다른 사대부가의 아이들처럼 홍명희도 어린 시절부터 한학 수업을 받았는데 탁월한 기억력과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다고 한다. 1901년 상경해 1902년 중교의숙(中橋義塾)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을 처음 접했고,졸업 후 고향에 돌아와 있던 중 일본인 부부를 만나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안돼 겪은 경술국치는 민족적 비애이면서 동시에 개인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로 그날 밤 아버지가 자결한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아버지의 3년 상이 끝날 때까지 문학도 포기한 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내다가 1912년 돌연 중국으로 간다.
이광수도 귀국해 오산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던 중 한일합방 소식을 들었다.이듬해 이광수는 세계의 정세와 동향을 살피기 위해 여행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우연히 정인보를 만나 상하이로 갔다.그곳에서 이광수와 홍명희는 다시 만난다. 이들은 문일평 등과 함께 방 하나를 빌려 독서를 하고 시국을 논하며 그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러다 이광수는 1915년 김성수의 도움으로 다시 일본 유학 길에 올랐고,이듬해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해 전 조선 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어린 벗에게>.《개척자》등을 발표하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다니던 그가 학업을 중단한 것은 한 여성과의 사랑 때문이었다. 이미 중매로 결혼한 아내가 있던 몸이지만 병들었던 그를 정성으로 간호해준 의사 허영숙과의 사랑 때문에 베이징으로 도피 행각을 떠 나기에 이른다.
베이징에서 신채호를 만나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민족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고 이듬해 2,8독립선언서를 쓴다. 그러고는 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사명을 띠고 1919년 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한다. 하지만 막상 상하이에 와서 독립운동의 속사정을 본 이광수는 절망했다. 이 당시 그는 조선이 근대화된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연인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상하이에 온후로 작년 9월부터 대단히 자포자기한 생활을 했습니다”라고 고백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상하이에 머물 당시에는 임시정부 기관지인《독립신문》주필을 맡아 3,1독립선언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섰으며,안창호와 각별했던 인연으로 흥사단의 임시 반장이 되어 일 하기도 했다.
그러다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면서 이광수의 짧았던 독립운동은 끝난다. 귀국하면서 징역 대신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난 이광수는 사이토 총독과 면담하는 등 세속적인 출세의 길로 들어선다.
상하이에서 귀국하면서 이광수가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최근에 발표된 연구들은 사실 그 훨씬 이전부터 이광수의 글에서 친일의 싹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열여 닮이던 1909년 쓴 단편〈사랑인가〉라는 소설은 고 아가 된 조선인 유학생이 고독과 번민 속에서 사랑을 찾다가 일본인 소년에게서 동성애적 감정을 느끼나 여전히 만족할 만한 애정은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미 이때부터 반민족의 씨를 품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광수는 독립운동에서 친일로 변절했다기보다는 평생 동안 친일을 하다 2 . 8독립선언부터 상하이에 머물 때까지만 예외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반면 홍명희는 평생 독립운동의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귀국한 뒤 그는 스스로 조선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언서를 작성하여 1919년 3월 19일 고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이끌었다. 그 대가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홍명희는 사회주의자 혹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지향한 민족해방운동의 노선을 분명히 선택함으로써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실력양성론이나 자치론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길을 걸었다. 아버지의 자결과 자신의 투옥으로 가세가 몰락하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상경해 교단에 서기도 하고 언론계에 몸담기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승훈이〈동아일보〉사장에 취임할 때 편집국장으로 초빙되어 일하기도 했고.<시대일보〉 편집국장,부사장을 역임했으며,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당시 좌우익의 사상적 대립을 극복하고자 뜻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신간회를 결성했는데,홍명희도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에 관여하며 이를 전국적인 반일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했다.그러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홍명희를 포함.90여이 체포,투옥됐다 2년이 넘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 신간회는 해산됐고,공들여 추진하던 민족통일전선은 최후를 맞고 만다.
이 시기 그는 1928년 10월부터〈조선일보〉에 연재하다 중단했던 장편소설《임꺽정》을 다시 집필하며 계급적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조선 중기의 지방 도둑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임꺽정의 이야기를 방대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계급적 의식과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사회상과 풍속을 재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 차례나 연재가 중단되었던《임꺽정》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채 광복 직후 전10권으로 간행되었다.
홍명희의 대표작인《임꺽정》이 반봉건적인 천민 계층을 내세워 귀족 계급을 타도하는 내용인 데 반해,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 이광수의 작품은 대부분 유교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성격을 비판하면서 남녀의 자유로운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귀국한 이듬해《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우리나라가 쇠퇴한 까닭은 타락한 민족성 때문이라 주장하며 이광수의 친일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아일보〉편집국장을 거쳐〈조선일보〉부사장을 지내며 《재생》.《마의태자》.《단종애사》. 《흙》 등을 발표해 다시 문단에서의 위치를 확보하기도 했지만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발발후, 더욱 노골적인 친일의 길을 걸으며,이름도 가야마 미쓰로’로 바꾸고 〈의무교육과 우리 각오> . <조선의 학도여> .〈반도민중의 애국운동〉 등의 글을 써 일제를 찬양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학생들에게 학병으로 지원하라는 연설을 하고 다닌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다.
1945년 광복의 날,경기도‘시골에 있으면서 그 이튿날에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이광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이내 친일파 처단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피신을 권하는 허영숙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그는〈나의 고백) . <돌베개〉를 비롯한 몇몇 글을 썼는데,그 글의 주요 내용은 “나는 민족을 위해 살고 민족을 위하다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 당해 투옥됐다가 건강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출옥했으나,6 •25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북돼 1950년 10월 25일 세창을 떠났다.이광수가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려진 바에 의하면,강계에서 좀 떨어진 산악 지대의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병약한 몸에 심한 동상까지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나중에 북한 부수상까지 지낸 홍명희의 도움으로 병원에 옮겼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비극적 말로를 맞은 이광수와 달리 홍명희에게 광복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열림이었다. 광복 후 홍명희는 민주독립당의 대표로 통일전선운동에 힘을 쏟다가 1947년 김구와 함께 평양의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북에 머물렀다. 이후 북한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내다 1968년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일평 1888~1939. 사학자 • 언론인.1910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중퇴하고 상하이로 건너가〈대공화보〉사에 근무했다. 귀국하여 중동 .중앙 • 배재 • 송도중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1933년〈조선일보〉편집고문에 취임하여,7년동안 논설을 집필하는 한편 한국사연구에 힘써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죽은 뒤 유고를 모아 1939년《호암전집》이 출판되었고,이외의 저서로는《조선사화》가 있다.
일진회 조선 말기 친일단체.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宋秉畯)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尹始炳) . 유학주(兪鶴柱) 등이 1904년 8월 18 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을사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했으며,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에는 모든 사태가 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공격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9월 26일,친일의 소임을 다하고 해체되었다.
정인보 한학자 •국학자.13세 때부터 양명학자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했고,국권피탈 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1919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 이화여자전문학교 • 불교전문학교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했고, <동아일보〉와〈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국학대학 학장,초대 감찰위원장을 역임하며 국학연구에 몰두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했다.저서에《조선사연구》.《양명학연론》. 《담원시조집》. 《담원국학산고》 등이 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