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金素月

bsk5865 2015. 4. 23. 15:2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4.23 06:41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金素月(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147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작사 박영호 작곡 김송규


쌍 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 없이 지향 없이
떠나갑니다 잊지를 말아요


金素月

생몰년도: 1902년-1934년
활동분야; 문학
다른 이 : 김정식(金廷湜)

생애와 업적

장에 다녀온 소월은 그날 밤도 여전히 색시와 둘이서 마주 앉
아 술을 따라 마셨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술에 취해 색시
는 세상 모르고 끓아 떨어졌다. 잠결에 남편인 소월이 무엇인가
입에 넣어주기에 깜짝 놀라 정선을 차려고 보셔 이미 소월은
싸늘하게 시체로 변해 있었다고 소월의 처는 그 당시의 상황
을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무슨 고통과 번민이 있었는지
사랑하는 아내에게 일절 말하지 않았으니 그의 아내도 하는
말이 “나야 무식해서 아나요, 또 이야기도 안 해주고요 마음
상하고 아프다고 술만 마셨답니다. 술잔만 들면 울기만 해요”
였을 뿐이다.


숙모 계희영이 전하는 소월의 마지막 모습이다. 당시 소월의 나이 서른둘,1934년 12월 23일의 일이다.

한국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소월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젊은 나이에 고독하고 불행했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김소월이 태어난 것은 1902년 9월 7일,구성군의 외가에서였다.당시 소월의 친가는 대가족 이어서 며느리가 몸을 풀기에 불편할 것을 염려한 시부모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리고 해 섣달 고향인 정주 곽산으로 돌아왔다.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가족의 사랑 속에 자랐다.

그러나 소월이 세 살 되던 해 닥친 아버지의 불운은 김소월 문학의 한(恨)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만큼 그에게 큰 사건이었다 처가 나들이를 위해 말 등에 음식을 가득 싣고 가던 길에 철도 공시를 하던 일본목도꾼들과 시비가 붙어 심한 매를 맞고 말 잔등에 거꾸로 매달려온 아버지는 한 달이 넘도록 의식을 앓은 채 말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깨어나기는 했어도 이후부터 정신을 놓아버렸다.소월의 아버지는 이 일로 일생 동안 폐인이 되어 대인관계를 끊고 홀로 앉아서 중얼거리기만 했다.

아버지의 부재,반사적으로 장손인 자기에게 더 얹어진 집안의 기대,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은 오빠는 선량하고 천성적으로 착했으나 마음이 좁고 편협한 사람이었다 는 여동생의 회고처럼 내향적이었던 소월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였다.그런 그에게 고대 소설과 설화에 밝았던 첫째 숙모 계희영은 유일한 말동무였고,안식처였다.계희영은 틈만 나면 이야기해달라고 조르는 소월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어 유년기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깨워주었다.소월의 시〈접동새) . (물마름〉등이 이러한 설화를 소재로 하여 씌어진 것이다.

어린 시절 독선생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던 김소월은 일곱 살 되던 해 남산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시절 소윌은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비범한 기억력과 관찰력을 보였다고 한다.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자주 했던 호기심 많은 소년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첫 사랑이라 할 수 있는 동네처녀 오순과의 만남은〈못잊어〉〈그리움〉 등을 낳았다.

남산학교를 졸업한 뒤 오산학교 중학부에 진학하는데, 여기에서 소월은 일생 동안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김억을 만나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을 걷게 된다.소월과 김억과의 첫 만남은 국어시간에 숙제검사를 하다가 이루어졌다.국어교사였던 김억이 숙제로 내준 글짓기에서 소월의 시〈애모〉를 보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시인으로서 소월의 재능을 본 김억은 창작지도를 하며 신문학이나 해외 문학 작품들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 무렵 김억을 감동시킨 소월의 작품들은〈못잊어). (예전에미처 몰랐어요).(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등이다. 그의 대표작들이 열다섯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에 주로 씌어진 것이다. 이렇게 일찍 꽃핀 소월의 천재성은 그러나 곧 시들고 만다.

3•1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강제 폐교되면서 소월은 3년여를 집에서 지내야 했다. 장손이 외지로 나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할아버지의 고집 때문이었다.그렇게 집에 있는 동안《창조》동인의 한 사람이었던 김억의 소개로그의 시가 세상에 나왔다.1920년 3월《창조》통권 5호에 〈낭인의 봄〉을 비롯한 다섯 편의 시가 소개된 것이다. 화려한 등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당시 문단의 반응은 대체로 좋았다.

박종화는“아아 그 시 속엔 얼마나 아름다운 기교가 있으며 얼마나 아름다운 조율이 있으며 안타까운 정서가 솟는가. 우리 무색한 시에 이러한 작품이 있음을 기뻐하여 마지아니한다"라고 칭찬했으며,주요한은“선진 하는 시인 중에 네 좋아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할 것 없이 노작 군과 소월 군을 들겠다 노작 군이나 소월 군은 둘이 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다”라고 했다.

이후 소월은 1922년에서 1924년 사이 주로《개벽》을 통해 오산학교 시절 써놓았던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면서 절정에 이른다. 이 시집은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 한국 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침내 할아버지를 설득한 소월은 배재학교에 편입하고,졸업하던 해 동경상대 예과에 입학 일본에 건너가지만 관동대지진으로 곧 귀국함으로써 짧은 유학 생활을 끝으로 학업을 마친다. 가산이 기울어 학업을 계속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장손을 더 이상 타지에 둘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이때부터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돌보면서 소일했는데,내성적이었던 소월은 동경 유학실패 후 실의와 좌절에 빠진 채 점점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며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사실 그는 학창 시절에도 거의 친구를 사귀지 못했을 정도로 비사교적이었다. 문단에서도 스승을 제외하고는 친구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향 길에 가끔 술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 나도향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또한 오산학교 시절 할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용모도 아름답지 않았던 아내를 사랑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머니를 비롯해 남편이 객지로 만 나돌던 숙모 등 불행한 여자들을 눈으로 보며 자랐던 소월인지라 아내를 홀대하지는 않아 결혼 생활은 큰 문제없어 보였다.

귀향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던 그는 1924년 끝내 처가인 구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할아버지의 간섭과 아버지의 병,종손의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고 말이 통하던 숙모마저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이사를 가자 더욱 힘들어하던 소월은 마침내 본가를 떠나는 것으로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사실 그의 죽음은‘갑작스럽게’다가왔다고 할 수 없다. 분가를 하면서부터,아니 유학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오면서부터 이미 그의 정신과 육체는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었다 본가를 나온 소월은 2년 뒤 다시 구성군 남시로 이사해〈동아일보〉지국을 경영했는데,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국을 경영했다고 하지만 실은 배포부터 수금까지 직접 해야 했다고 하는데,그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부터 소월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또한 이즈음 일본 관헌의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수시로 일본 순사까지 찾아와 괴롭히고 모욕을 주기까지 하니 더 더욱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월은 1935년 1월 김억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어려움을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구성에 와서 명년이 10년이옵니다.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입니다. 산촌에 와서 10년 있는 동안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인사(人事)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세기(世紀)는 저를 버리고 혼자서 앞서서 달아난 것 같사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든 돈만 좀 놓아 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여야 좋겠느냐 하옵니다"

생활고와 그로 인한 꿈의 좌절,그리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한,이러한 것들이 젊은 소월을 차츰차츰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소월은 여기에 격렬히 저항할 만큼 강하지 못했고,꿋꿋이 버려낼 만큼 질기지 못했다.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잊고자 했다. 때로는 집에서,때로는 시장 터에서,술로 위안을 삼으며 그는 무너져 내렸다. 여기에 마음속의 연인이었던 오순의 죽음과 유일한 친구였던 나도향의 요절은 그를 더욱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의 시신은 고향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고개 위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왕릉산으로 이장되었다.


평 가

소월은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시인이다. 소월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진달래꽃〉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른 내린 시도 드물 것이다. 또한 소월이 남긴 작품 수보다 그에 대한 연구업적이 더 많다는 사실은 소월의 시가 한국시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반영한다.

김억,주요한,이광수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들은 소월의 시를 서정적 민요시로 규정했으며, 그 가운데 김억은 소월 시의 특징으로 7,5조의 운율미와 대중적 생명력을 들었다. 또한 오장환은 소월의 시가 고도의 상징성을 띠어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했으며,서정주는 소월의 시가 정한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이 정한은 한국인의 고유 정서인 만큼 소월 시는 전통미학에 맥이 닿아 있다고 분석했다.그리고 평론가 조연현은 자신의 저서에서 소월에 대해 “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볼 때,19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한편, 2002년 계간지《시인세계》 창간호에서 시인과 평론가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소월이 뽑혔는데,이 책은 그 이유에 대해 “이전의 문학언어를 정교하게 다듬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석했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남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김 억

1896~? 시인 및 평론가. 1914,1915년《학지굉》에시 〈이별> .<야반>.<나의 적은 새야>.<밤과 나〉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1918년《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 상정주의 시를 번역하고 소개했으며,창작시를 발표했다. 《창조》.《폐허》.《영대》.《개벽》.《조선문단》.<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시 • 평론 • 수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진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타고르 • 투르게네프 등 해외문학의 번역 • 소개에 있어서 그가 남긴 공적은 매우 컸다. 특히 1921년 간행된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3년에 간행된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당시 《폐허》 및 《백조》 동인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소월의 스승으로서 김소월을 민요시인으로 길러냈고,자신도 뒤에는 민요조의 시를 많이 썼다. 해외시를 번역하는 데 주력한 다음,이어서 민요시 운동에도 적극성을 보였던 그는 1920년대 한국 근대시 형성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종하

1901 ~1981. 시인 • 소설가 • 비평가. 1947년에는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진영의 대표자로서 1949년에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서울신문사사장,예술원 회장 등을 지냈고, 제1회 예술원상,제1회 5 .16민족상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단편 〈목 메이는 여자) ,시집 《흑방비곡》. 《청자부》, 장편 《금삼의 피》.《다정불심》 등이 있다.


주요한

1900~1979. 시인 • 언론인 • 정치가. 일본 도쿄 제1고등학교를 거쳐 상하이 후장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독립신문〉 기자를 지냈으며,귀국한 뒤〈동아일보> . <조선일보〉의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다. 8•15광복 후에는 민주당민의원이 되었고 4• 19혁명 뒤에는 부흥부장관 및 상공부장관을 지냈다. 1917년 소설《마을집》으로 문단에 등단했고 〈불놀이> . <빗소리〉 등의 시를 발표했다. 저서로 시집 《아름다운새벽》. 《봉사꽃》등과논저 《자유의 구름다리》. 《부흥 논의》. 《안도산전서》 등이 있다.


오장환

1916~1951. 시인.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시《조선문학》에 산문시 〈목욕간〉을 발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낭만》.《시인부락》.《자오선》 등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성벽》.《헌사》 두 권의 시집으로 정지용(鄭芝溶)에 이어‘시단의 왕’으로 까지 일컬어졌으나,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프롤레타리아문학을 지향했다. 1946년 월북하여 시집 《붉은 기》를 펴냈다 월북 전의 대표작으로는 《성씨보》. 《수부》 . 《향수》 등이 있다.


서정주

1915~2000. 시인.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동국대학교 교수,한국문인협회 이사장,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1936년 〈동L아일보〉 신춘문예에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한 뒤 김광균(金光均) . 김달진(金達鎭). 김동리(金東里) 등과 동인지 《시인부릭》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화사집》. 《귀촉도》. 《서정주시선》. 《동천》, 저서로 《한국의 현대시》 등이 있다.


관동대지진

1923년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수습 과정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유언비어가 조장되어 조선인 대량학살로 이어진 사건을 말한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으로 10만에 이르는 사망자,4만이 넘는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지진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토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은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 양으로 삼았다. 내각은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폭동을 일으키려 한다!’‘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조선인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이것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의 대대적인 조선인사냥이 시작됐고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의 일본인자경단(自警團)이 조선인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조선인의 숫자는 가장 적게 잡아도 2,500명이 넘고,문헌에 따라서는 6,000명에서 1만 명을 넘기도 한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