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日から絆みち-日向しのぶ 作詞 いとう彩 作曲 桧原さとし
一 うさぎと亀なら 亀だと笑う 遅いあなたに惚れたのよ 惚れたのよ 女の懸けとは そんなもの 心に春さえ あればいい しみじみと… ほのぼのと… 嬉しい嬉しい 絆みち 今日から一緒
二 冷たい言葉に 身を切るような 別れ悲しい恋もした 恋もした 女の週去には ふれないで 酔ったら優しく 肩抱いて そのままで… このままで… いいのよいいのよ 絆みち 今日から一緒
三 嵐や稲妻 窓打つ宵は そっと背中にすがるのよ すがるのよ 女の倖せ そんなもの 言葉はいらない なくていい 離れずに… 離さずに… 信じて信じて 絆みち 今日から一緒
淸貧한 宰相들 朝鮮의 淸白吏로 選任되기는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自身은 勿論 家內까지 淸貧해야 했습니다. 宰相 淸白吏는 더욱 드문데 高宗 때 編纂된 ‘淸選考’는 宰相 淸白吏를 따로 적고 있습니다. 世宗 때의 李原 黃喜 柳寬 孟思誠, 世祖 때의 具致寬, 燕山君 때의 許琛, 中宗 때의 金詮, 明宗 때의 李浚慶, 宣祖 때의 沈守慶 柳成龍 李元翼 李恒福, 仁祖 때의 金尙憲, 孝宗 때의 李時白, 顯宗 때의 洪命夏, 肅宗 때의 李尙眞으로 모두 열여섯 名에 지나지 않습니다. 肅宗 때 尹趾完을 넣기도 하는데, 大部分 귀에 익은 이름이니 淸貧한 宰相들이 業績도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가집에서 살던 世宗 때의 柳寬은 장마 때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자 雨傘으로 비를 막으며 夫人에게, “이 雨傘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라고 말했답니다. 夫人이 “雨傘 없는 집엔 다른 準備가 있답니다.”라고 쏘아붙이자 柳寬이 웃었다고 ‘筆苑雜記’는 傳합니다.
世宗은 하루 동안 南大門으로 들어오는 모든 物件을 사서 黃喜에게 주라고 命했는데, 공교롭게도 새벽부터 暴風雨가 몰아쳐 商人의 발길이 없어 저녁에 겨우 달걀 한 꾸러미를 求했습니다. 집으로 가지고 와 삶아 먹으려 하자 모두 곯아 먹을 수 없었다고 ‘松南雜識’는 傳합니다. 여기에서 “鷄卵에도 뼈가 있다”는 ‘鷄卵有骨’이란 古事成語가 생겼다고 합니다. 또 李瀷은 ‘星湖僿說(성호사설)’ 人事文에서 “柳成龍이 世上을 떠날 때 집에는 남은 財産이 없어 여러 아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거의 살아갈 도리가 없었다.”고 傳합니다.
낡은 점퍼로 中國人을 感動시킨 中國의 溫家寶(원자바오) 總理가 다음에는 밑창 터진 運動靴로 다시 話題가 되었습니다. 高速經濟發展을 牽引하면서도 極度로 儉素한 中國 總理의 處身이 極甚한 經題沈滯 속에서 高位 公職者의 잇단 騷音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절로 부러움을 주네요.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