バラの咲く頃に…-秋山涼子 作詞 木下龍太郎 作曲 松井義久
一 さよならは こころの中で 花が聴いたら 悲しむでしょう それぞれ誰かと 恋をして 愛せぬことに 気付いたら また 逢いましょう 再びバラの咲く頃に 二人の愛こそ 本物だから…。
二 数々の 言い争いに 花はこころを 痛めたでしょう わがまま同士で 意地っぱり 傷付け合って いたみたい また逢いましょう 世界のバラの咲く丘で やさしい二人に 変われたならば…。
三 さよならは こころの中で 花が聴いたら 悲しむでしょう 離れて暮らして 人の世の 寒さに胸が 凍えたら また逢いましょう 再びバラの咲く頃に ぬくもり分け合い 生きてくために…。
단돈 5$에 強奪當한 駐美公使館 建物 "駐美公使代理 金潤晶氏가 本月3日 화성돈(華盛頓:워싱턴)에서 發程하였다더라."(皇城新聞1906.3.7.)
1905年 11月 乙巳勒約 締結 以後, 駐美 代理公使 金潤晶(1869~?)은 公使館을 閉鎖한다는 外部大臣 李完用의 訓令에 따라 公使館 財産과 文書를 整理해 駐美 日本公使館에 引繼했습니다. 金潤晶은 淸日戰爭 以後 日本 敎官에게 士官生徒 敎育을 받았고, 俄館播遷 以後 學部 留学生으로 渡美해 1903年 Colorado州立大를 卒業했습니다. 駐美 日本公使館 周旋으로 駐美 韓國公使館 書記生으로 들어가 代理公使까지 昇進했습니다.
本國의 訓令 없이 日本 外相의 訓令을 따르다가 高宗에게 5次例 譴責을 받기도 했습니다. 公使館 閉鎖 以後 金潤晶은 이렇듯 日本과의 '特別한 因緣'을 强調하며 日本公使館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要請했습니다. 워싱턴이 困難하다면 Hawaii駐在 日本領事館에서라도 일하게 해달라고 事情했지만, 拒否當하고 마지못해 歸國길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歸國 後 金潤晶은 母校인 Colorado州立大 總長의 紹介로 伊藤博文의 推薦狀을 얻어 泰安 郡守, 仁川 府尹에 登用되었고, 強制併合 以後에는 忠北知事, 中樞院 參議 等을 歴任했습니다. 光復 以後에는 70代 中半의 나이로 軍政廳 Hodge中將에게 代理公使 證書, 伊藤博文 等을 英文으로 飜譯•添附해 登用해 달라는 陳情書를 提出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後 李承晩•金九•金奎植 等에게 便紙와 電話로 登用해 달라고 떼를 쓰다가 '面會 強要罪'로 警察에 逮捕되기도 했습니다.
金潤晶이 駐美 日本公使館에 넘긴 駐美 韓國公使館 建物은 1891年 駐美 代理公使 李采淵이 高宗의 内帑金(내탕금) 2万5000달러로 買入해 追加로 5000달러를 들여 修理한 建物이었습니다. 韓美關係史를 專攻한 김원모 敎授가 Washington 文書保管所에서 發掘한 賣買契約書에는 1910年 6月 29日 '駐美 日本公使 内田康哉'가 '韓國 太皇帝 陛下 李형(熙←灬를 빼고 火) '에게 이 建物을 '5$'에 買入한 것으로 記録돼 있습니다. 強制併合 이틀 後 内田康哉는 이 建物을 美國人 풀턴(H. K.Fulton)에게 단돈 '10$'를 받고 賣渡했다는 賣買契約서도 남아 있습니다.
2万5000달러짜리 建物을 5달러에 買入해 10달러에 賣渡한 理解하기 어려운 契約은 實 去來價를 밝히지 않는 當時 Washington의 不動産 賣買 慣行이 빚은 해프닝이었습니다. 日本 外務省 資料에 따르면, 内田康哉는 高宗에게 단돈 1달러도 준 적이 없었고, 풀턴에게 實際로 받은 돈은 1万 $ 였습니다.
金潤晶에게 韓國公使館 建物을 넘겨받은 駐美 日本公使館은 韓國이 獨立國임을 證明하는 强力한 象徵物이었던 이 建物을 서둘러 賣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Washington의 不動産 景氣가 나빠 賣却이 遲延되자 强制倂合 以後 1万 $라는 터무니없는 價格으로 팔아 넘긴 것이었습니다.
現在 住宅으로 使用되고 있는 駐美公使館 建物을 되 사들이기 爲해 政府는 30憶원의 豫算까지 編成했지만, 이 建物의 歷史的 價値를 잘 알고 있는 집主人(美國人 辯護士)이 터무니없이 높은 價格을 要求하는 바람에 賣買協商은 踏步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글 전봉관 교수(KAIST 한국학) |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