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恋-塩野雅子 作詩 石川啄木 作曲 越谷達之助
砂山の砂に 砂にはらばい 初恋のいたみを 遠くおもい出ずる日
初恋のいたみを 遠く遠く ああ おもい出ずる日
砂山の砂に 砂にはらばい 初恋のいたみを 遠くおもい出ずる日
朝鮮佛敎維新論과 韓龍雲 韓龍雲(1879~1944)이 1908年 日本에 건너가 曹洞宗의 總本山인 曹洞宗大學[現在의 駒沢大学(こまざわだいがく)]에서 工夫했던 事實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이 大學의 機關紙인 '和融誌'(1908.6.)에 "韓國 江原道 干城郡 乾鳳寺의 徒弟인 韓龍雲君이 혼자서 日本 佛敎를 工夫하기 爲해 5月 9日 曹洞宗大學을 찾아왔다"는 짤막한 記事가 실려 있습니다.
韓龍雲은 忠南 洪城에서 出生하여 獨立運動家로 僧侶로, 書堂에서 漢學을 배우다가 靑年時節 東學運動에 加擔했지만, 失敗하자 1896年 雪嶽山 五歲庵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 1905年 麟蹄의 百潭寺에서 連谷을 스승으로 僧侶가 되고 萬化에게서 法을 받았습니다. 日本이 朝鮮統監府를 設置하고 '韓國寺院管理規則'(1906. 11.)을 通해 佛敎 寺刹을 統括하고자 했을 때, 韓龍雲은 佛敎의 敎理를 探究하면서 世界 秩序의 變化에 關心을 두기 始作했습니다. 그는 百潭寺에서 下山하여 日本 佛敎의 現況을 알아보기 爲해 日本으로 건너갔습니다. 韓龍雲이 찾은 曹洞宗大學은 日本 佛敎의 最大 宗派인 曹洞宗이 佛敎 思想의 硏究와 禪의 實踐을 내세우면서 運營했던 佛敎 專門大學이었습니다. 이곳에서 韓龍雲은 明治維新 以後 日本 佛敎의 近代的인 變革 過程을 觀察하면서 佛敎의 大衆化에 對한 새로운 計劃을 構想했습니다. 4個月 동안 日本 佛敎의 實像을 把握한 그는 그 해 9月 1日 歸國길에 올랐습니다.
韓龍雲이 歸國할 무렵, 韓國 佛敎界에서는 海印寺 住持였던 李晦光이 主動하여 圓宗 宗務院을 設立(1908)하였습니다. 이들은 1910年 日本의 强占이 이루어지자 韓國의 圓宗과 日本 曹洞宗의 聯合을 爲한 條約을 締結하게 되었습니다. 이 條約은 韓日 佛敎의 聯合과 相互 協力을 내세웠지만, 韓國 佛敎가 日本 曹洞宗에 復屬되는 것을 意味하는 要件들을 規定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對한 反撥이 全國 寺刹에서 일어났습니다. 韓龍雲은 日本 曹洞宗과의 聯合에 反對하기 爲해 1911年 1月 松廣寺에 새롭게 設立한 臨濟宗 宗務院의 臨時 管掌代理가 되어 臨濟宗 運動을 主導하게 되었으며, 自身이 構想하였던 佛敎의 改革 方案을 具體化하기 始作했습니다
1910年 韓龍雲이 百潭寺에서 脫稿한 것으로 알려진 '朝鮮佛敎維新論'(1913)은 韓國 佛敎 千年의 歷史에서 가장 劃期的인 改革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佛敎를 民族 宗敎로 바로 세우기 爲해서는 먼저 佛敎의 敎理에 對한 僧侶의 敎育이 劃期的으로 改善되어야 하며, 佛敎의 宗敎的 理念과 그 敎旨의 再確立이 必要하다는 点을 强調했습니다. 그는 "오늘 朝鮮佛敎의 念佛은 念佛이 아니고 呼佛이다"라며, 僧侶의 參禪을 義務化하고 念佛堂을 廢止할 것을 主張했습니다. 山中 寺刹이 '無冒險的 無救世的이며 無競爭的'임을 指摘하면서 佛敎의 大衆的 布敎를 爲해 寺刹이 都心으로 進出하여 一般 大衆과 함께 할 것도 要求했습니다. 그는 寺刹 住職도 投票에 依해 選出할 것을 主張했으며, 부처님 以後 僧家의 戒律처럼 지켜온 僧侶의 獨身生活을 拒否하고 "佛敎가 그 아내요, 男便이 아니라면 娶嫁하라"고 勸했습니다.
이 같은 破格的인 主張을 내세우면서 佛敎의 改革에 앞장섰던 日帝時代 때는 詩集‘님의 침묵’을 出刊해 抵抗文學에 앞장섰고, 佛敎를 通한 靑年運動을 强化했습니다. 1908年 全國 寺刹代表 52人의 한 사람으로 日帝의 不當한 彈壓에 抵抗하는 民族運動을 主導하여. 1962年 建國勳章 大韓民國章이 追敍됐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