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お吉花無情-笹みどり///日本 騎馬部隊를 무찌른 李圭弘 義兵將

bsk5865 2015. 7. 28. 08:53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7.28 06:25

 

  お吉花無情-笹みどり///日本 騎馬部隊를 무찌른 李圭弘 義兵將 (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590 




お吉花無情-笹みどり

作詞 水木れいじ 作曲 市川昭介 編曲 池多孝春


なにを今さら 泣くのはおよし
返る身じゃなし 恋じゃなし
誰に踏まれて 散ろうとままよ
お吉哀しや お吉哀しや おしろい椿


駕籠に揺られて ふりむけば
下田みなとは 雨ん中
一目逢いたい 別れがしたい
幼馴染の 鶴松さんに
なさけ通わす エェ…… 舟もない


死んであの日に 戻れるならば
なんの惜しかろ この命
まわり舞台か 憂き世とやらは
千鳥懐かし 千鳥懐かし らしゃめん月夜

(セリフ)
想いだすねェ…… 浜田屋の
離れ座敷の あの夜を…
私だって 花も恥じらう16の
そんな昔も あったのに
あれも夢 これも夢 みんな夢なんだ


いらぬお世話と 火の酒あびて
唄う なみだの 明烏
今は昔よ おんなの春も
あわれお吉の あわれお吉の 黒髪ざんげ


日本 騎馬部隊를 무찌른 李圭弘 義兵將

國權回復을 爲해 싸운 抗日鬪士 가운데 全羅道 益山의 李圭弘 義兵將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李圭弘은 1881年 益山 關東(지금의 八峰面 石岩里)에서 中樞院 議官을 지낸 李璂榮의 長男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氣骨이 壯大하고 性品이 剛直하였으며 사람을 包容하는 雅量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李璂榮은 3千 石 지기의 大 富豪였습니다.

乙巳勒約으로 外交權이 日本에 넘어가게 되자, 1906年 4月 李圭弘은 26歲의 젊은 나이로 平生同志 朴駬桓, 文亨模와 함께 義兵을 일으켜 나라를 되찾자는 義血同盟을 맺었습니다. 4月 25日 이들은 泰仁 武城書院에서 湖南義兵을 일으킨 崔益鉉과 林炳瓚 先生을 찾아가 스승의 禮를 올린 뒤, 그 麾下에서 싸우기로 盟約하였습니다. 아들의 決然한 意地를 確因한 아버지 璂榮 公은 "國家의 危機를 맞아 報國의 道理를 다하게 된 내 아들이 자랑스럽다. 家産의 全部라도 바칠 테니 오로지 國家에 獻身하라" 며 幾万원을 快擲(쾌척)하였습니다.

1907年 1月 林炳瓚이 對馬島에서 殉國한 崔益鉉의 遺骸를 안고 歸國하자, 李圭弘은 스승을 찾아 뵙고 起兵을 約定했습니다. 그는 집에 備蓄된 穀食과 500 두락의 田畓을 팔아 義兵을 聚合하니 各處에서 志士들이 다투어 모였습니다. 義兵은 全州에서 解散된 진위대원 100名을 中心으로 益山•驪山 一帶의 山砲手와 뜻있는 人士들로 構成되었습니다. 李圭弘의 '梧下日記'에는 募集된 義兵이 257名, 西洋銃 100자루, 韓式銃 200자루, 鉛丸이 20여두, 火藥이 10여두라고 記錄되어 있습니다.

1907年 11月 6日 益山 관동에서 出兵式을 할 때 李圭弘은 "倭軍은 힘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義로써 싸운다. 義는 힘을 이긴다"고 외쳤습니다. 李圭弘 義兵軍은 龍潭의 雲長山에서 勝利를 비는 告天祭를 지낸 뒤 11月 15日 가금리 戰鬪에서 日軍 29名을 射殺했습니다. 鎭安•長水•龍潭을 넘나들며 戰鬪를 하던 中 12月 25日에는 日軍 44名을 射殺했습니다. 1908年에는 珍山•錦山 等地에서 日本 正規騎馬部隊 600名과 싸워 56名을 없앴습니다. 그 사이 我軍도 85名을 잃었습니다.

日本軍은 李圭弘의 목에 4000원의 懸賞金을 걸고 逮捕에 血眼이었습니다. 李圭弘은 大德郡 山內面 沙寒里의 宋昌在 집에 隱居하였습니다. 이를 눈치 챈 日軍이 쫓아와 더 以上 버틸 수 없게 되자 1908年 4月 20日 部隊를 解散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날 밤 그는 피눈물을 토하듯이 詩 한 首를 지었습니다.

'칼을 던지고 텅 빈 산에 앉아 있으니/ 흐르는 눈물이 옷을 적시네/ 저 두견새가 내 마음을 헤아려/ 불여귀의 비정을 함께 울어주는구나

解軍 以後 숨어 活動하던 李圭弘은 1918年 上海로 亡命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獨立請願書를 갖고 파리에 떠나는 金奎植에게 1300원의 經費를 支援하였고, 間島에서는 金佐鎭 將軍을 만나 마지막 남은 3000원을 獨立軍 養成資金으로 出捐햇습니다다. 그 後 國內로 들어와 抗日運動을 繼續하던 李圭弘은 1924年 2月 8日 日警에 逮捕되어 酷毒한 拷問을 當했습니다. 4個月 後 釋放되었으나 拷問의 後遺症으로 그는 1929年 6月 6日 享年 48歲로 눈을 감았습니다. 지금 益山市의 뜻있는 분들이 李圭弘을 비롯한 17義士 記念館 建立을 推進하고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お吉花無情-笹みどり

作詞 水木れいじ 作曲 市川昭介 編曲 池多孝春


なにを今さら 泣くのはおよし
返る身じゃなし 恋じゃなし
誰に踏まれて 散ろうとままよ
お吉哀しや お吉哀しや おしろい椿


駕籠に揺られて ふりむけば
下田みなとは 雨ん中
一目逢いたい 別れがしたい
幼馴染の 鶴松さんに
なさけ通わす エェ…… 舟もない


死んであの日に 戻れるならば
なんの惜しかろ この命
まわり舞台か 憂き世とやらは
千鳥懐かし 千鳥懐かし らしゃめん月夜

(セリフ)
想いだすねェ…… 浜田屋の
離れ座敷の あの夜を…
私だって 花も恥じらう16の
そんな昔も あったのに
あれも夢 これも夢 みんな夢なんだ


いらぬお世話と 火の酒あびて
唄う なみだの 明烏
今は昔よ おんなの春も
あわれお吉の あわれお吉の 黒髪ざんげ


日本 騎馬部隊를 무찌른 李圭弘 義兵將

國權回復을 爲해 싸운 抗日鬪士 가운데 全羅道 益山의 李圭弘 義兵將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李圭弘은 1881年 益山 關東(지금의 八峰面 石岩里)에서 中樞院 議官을 지낸 李璂榮의 長男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氣骨이 壯大하고 性品이 剛直하였으며 사람을 包容하는 雅量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李璂榮은 3千 石 지기의 大 富豪였습니다.

乙巳勒約으로 外交權이 日本에 넘어가게 되자, 1906年 4月 李圭弘은 26歲의 젊은 나이로 平生同志 朴駬桓, 文亨模와 함께 義兵을 일으켜 나라를 되찾자는 義血同盟을 맺었습니다. 4月 25日 이들은 泰仁 武城書院에서 湖南義兵을 일으킨 崔益鉉과 林炳瓚 先生을 찾아가 스승의 禮를 올린 뒤, 그 麾下에서 싸우기로 盟約하였습니다. 아들의 決然한 意地를 確因한 아버지 璂榮 公은 "國家의 危機를 맞아 報國의 道理를 다하게 된 내 아들이 자랑스럽다. 家産의 全部라도 바칠 테니 오로지 國家에 獻身하라" 며 幾万원을 快擲(쾌척)하였습니다.

1907年 1月 林炳瓚이 對馬島에서 殉國한 崔益鉉의 遺骸를 안고 歸國하자, 李圭弘은 스승을 찾아 뵙고 起兵을 約定했습니다. 그는 집에 備蓄된 穀食과 500 두락의 田畓을 팔아 義兵을 聚合하니 各處에서 志士들이 다투어 모였습니다. 義兵은 全州에서 解散된 진위대원 100名을 中心으로 益山•驪山 一帶의 山砲手와 뜻있는 人士들로 構成되었습니다. 李圭弘의 '梧下日記'에는 募集된 義兵이 257名, 西洋銃 100자루, 韓式銃 200자루, 鉛丸이 20여두, 火藥이 10여두라고 記錄되어 있습니다.

1907年 11月 6日 益山 관동에서 出兵式을 할 때 李圭弘은 "倭軍은 힘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義로써 싸운다. 義는 힘을 이긴다"고 외쳤습니다. 李圭弘 義兵軍은 龍潭의 雲長山에서 勝利를 비는 告天祭를 지낸 뒤 11月 15日 가금리 戰鬪에서 日軍 29名을 射殺했습니다. 鎭安•長水•龍潭을 넘나들며 戰鬪를 하던 中 12月 25日에는 日軍 44名을 射殺했습니다. 1908年에는 珍山•錦山 等地에서 日本 正規騎馬部隊 600名과 싸워 56名을 없앴습니다. 그 사이 我軍도 85名을 잃었습니다.

日本軍은 李圭弘의 목에 4000원의 懸賞金을 걸고 逮捕에 血眼이었습니다. 李圭弘은 大德郡 山內面 沙寒里의 宋昌在 집에 隱居하였습니다. 이를 눈치 챈 日軍이 쫓아와 더 以上 버틸 수 없게 되자 1908年 4月 20日 部隊를 解散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날 밤 그는 피눈물을 토하듯이 詩 한 首를 지었습니다.

'칼을 던지고 텅 빈 산에 앉아 있으니/ 흐르는 눈물이 옷을 적시네/ 저 두견새가 내 마음을 헤아려/ 불여귀의 비정을 함께 울어주는구나

解軍 以後 숨어 活動하던 李圭弘은 1918年 上海로 亡命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獨立請願書를 갖고 파리에 떠나는 金奎植에게 1300원의 經費를 支援하였고, 間島에서는 金佐鎭 將軍을 만나 마지막 남은 3000원을 獨立軍 養成資金으로 出捐햇습니다다. 그 後 國內로 들어와 抗日運動을 繼續하던 李圭弘은 1924年 2月 8日 日警에 逮捕되어 酷毒한 拷問을 當했습니다. 4個月 後 釋放되었으나 拷問의 後遺症으로 그는 1929年 6月 6日 享年 48歲로 눈을 감았습니다. 지금 益山市의 뜻있는 분들이 李圭弘을 비롯한 17義士 記念館 建立을 推進하고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