去國行-조관우 작사 안창호 작곡 이상준 편곡 고동훈
一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 가게 하니 이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하리니 간다고 슬퍼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二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저 시운을 대적타가 열흘들을 뿌리고서 네 품속에 누어 자는 형제를 다 깨워서 한번 기껏 해봤으면 속이 시원 하겠다만 장래 일을 생각 하야 분을 참고 떠나가니 내가가면 영 갈 소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三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내가 너를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때도 있을 지며 시베리아 만주 뜰에 다닐 때도 있을지라 비록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있던지 너를 생각 할 터이니 너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四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이별 할 때에는 빈주먹만 들고 가나 이후 상봉 할 때에는 기를 들고 올 터이니 눈물 흘린 이 이별이 기쁜 맞이 되리로다 요 풍 폭우 심한 이때 부디부디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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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의 등불 島山 安昌浩 위 歌詞는 1910年 봄 島山 安昌浩(1878~1938)가 사랑하는 祖國을 떠나 國外로 亡命하면서 지은 去國歌입니다.그가 祖國을 떠난 것은 國內의 穩健한 獨立運動이 限界에 부딪힘에 따라 國外에 抗日鬪爭의 根據地를 마련하기 爲한 目的이었습니다.
平南 江西의 가난한 農夫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安昌浩는 17歲에 上京하여 近代 敎育을 받은 뒤 獨立協會 運動에 參與하고 敎育運動을 展開하다가 1902年 美國으로 건너갔습니다. 1905年 샌프란시스코에서 僑胞 勞動者들의 權益 香床과 祖國의 獨立을 爲해 共立協會를 創立하고 會長을 맡았습니다. 乙巳年 以後 國權이 날로 失墜되자 1907年 봄 國內로 돌아와 秘密結社 新民會를 組織하였습니다. 美國式 民主主義를 體驗하고 이를 韓國에 實現하고자 했던 그는 大成學校를 設立하여 愛國 靑年들을 養成하고, 太極書館과 平壤瓷器會社 等을 세워 財源을 마련했습니다. 武裝鬪爭보다 敎育과 實業振興을 通해 獨立할 實力을 갖추게 될 때 自主獨立의 民主主義 國家를 建設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安昌浩가 西北 地域의 젊은 民族運動 指導者〈왼쪽 사진〉(가운데)로 浮刻되자, 平北 郭山 出身의 親日 政客 최석하는 伊藤博文가 李完用 內閣을 不信한다고 보고, 安昌浩 中心의 靑年 內閣을 만드는 工作을 推進했습니다. 그의 周旋에 依해 安昌浩와 伊藤博文가 두 차례 만났습니다. 伊藤는 自身의 東洋平和 構想은 '韓國을 훌륭한 나라로 만들기 爲한 것'이라며 安昌浩에게 協力을 要請했습니다.
이에 安昌浩는 "日本이 韓國을 위한다면 韓國의 自主獨立을 許容해야 한다"면서 "韓人 獨立運動家들을 逮捕하는 것이 韓國을 爲한 것이냐"고 抗議했습니다. 伊藤博文는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辨明했습니다. 安昌浩는 伊藤가 韓國을 돕는다는 것이 僞善이라고 보고 그의 協助 要請을 拒絶했습니다.
1909年 10月 26日 安重根에 依해 伊藤博文가 處斷되었습니다. 安昌浩도 이에 連累되어 開城 監獄에 投獄되었다가 3個月 後 풀려났습니다. 救國運動에 對한 日帝의 彈壓이 露骨化되어 穩健한 漸進主義的 運動조차 不可能한 狀況이 展開되었습니다. 최석하는 또 다시 安昌浩에게 接近하여 "겉으로 日本과 協力하면서 속으로는 救國運動을 하자"고 提案했습니다. 또 畿湖派에 對抗해 西北派가 힘을 길러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최석하는 西北學會 會長과 帝國新聞社 社長이었던 黃海道 平山 出身의 鄭雲復과 함께 一進會•大韓協會•西北學會 等 3個 團體의 聯合運動을 推進하면서 安昌浩에게 入黨을 要求했습니다. 이에 安昌浩는 "거짓된 僞裝 運動이나 地域 色 助長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拒絶하였다. 以後 그는 新民會 人事들과의 緊密한 協議 끝에 國外 亡命을 決心합니다. 이로써 國外 抗日 獨立戰爭을 爲한 準備가 本格化하게 되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