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의 날 慶南 宜寧郡 柳谷面에는 둘레 7m, 키 15m에 達하는 500年 넘은 느티나무가 서 있습니다. 壬辰倭亂 最初의 義兵將 郭再祐가 兵士를 모으기 爲해 큰 북을 내걸었던 나무입니다. 宜寧郡은 해마다 4月 義兵祭典을 열 때면 이 나무 아래서 聖火를 採火합니다. 1592年 봄 釜山으로 쳐들어온 倭軍은 20日 만에 首都 漢陽을 무너뜨렸습니다. 10名밖에 안 되는 집안 젊은이로 始作한 郭再祐 義兵은 倭軍을 相對로 數많은 戰果를 올리며 反轉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見危授命(나라가 危殆로우면 목숨을 바친다)'이 郭再祐의 信條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明나라 使臣으로 갔을 때 받아온 붉은 緋緞으로 將帥服을 지어 입어 ' 紅衣將軍'이라 불렸습니다. 倭軍이 紅衣將軍을 잡느라 血眼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여러 兵士에게 붉은 옷을 입혀 倭軍을 헷갈리게 하고 게릴라 戰術로 무찔렀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紅衣將軍 郭再祐'는 1552年에 태어나셔서 1617年에 돌아가신 분으로 慶尙左道防禦使(1597) 折衝將軍(1592)等을 하였습니다.
朝鮮時代의 義兵將으로써, 字는 季綏, 號는 忘憂堂. 本貫은 玄風. 慶尙道 宜寧 出生이며, 曺植의 文人. 文武에 모두 뛰어났습니다. 1585年(宣祖18 年) 庭試文科에 及第했으나 王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罷榜되었습니다.
1592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宜寧에서 義兵을 일으켜, 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며 거듭 倭敵을 무찔렀으나, 觀察使 金睟와 不和, 金睟의 謀陷으로 도둑 陋名을 쓰고 逮捕되었다가 招諭使 金誠一의 狀啓로 無罪임이 밝혀져 釋放되었습니다.
幽谷道察訪•助防將•星州牧使를 지냈고, 1597年 丁酉再亂에 慶尙左道防禦使가 되어 火旺山城을 지켰습니다. 이 해 繼母 喪을 當하여 蔚珍으로 가서 杜門不出, 3年 喪을 치르고 나서 晉州牧使 兼 慶尙右道助防將이 되었습니다.
1613年(光海君 5) 永昌大君을 伸救하는 上疏文을 올리고 辭職, 落鄕했으며. 數次에 걸쳐 慶尙道의 兵馬節度使•水軍統制使 等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辭退했다가 自己의 經綸을 펴 볼 생각으로 副摠管•漢城府左尹•咸鏡道觀察使로 나갔으나 朝野가 混濁하고 紀綱이 紊亂함을 慨嘆하여 다시 隱遁生活을 하게 되었습니다.
筆體가 雄健 豁達했고 詩文에도 能했습니다. 死後 그의 祠堂에 禮淵書院이라는 賜額이 내려졌으며. 諡號는 忠翼이라고 합니다. 郭再祐將軍님이 第一 알려지기 有名한건 '紅衣將軍'이며, 그것은 壬辰倭亂 때에 倭軍과 싸울 때 無條件 紅色옷을 입고 싸웠기 때문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는 富有한 兩班의 出生이었는데 나중에 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에 家産을 모두 蕩盡하여 軍事를 먹이고 武器를 사고 하는 데에 다 썼다고 합니다. 이때 郭再祐 將軍님의 婦人이 하는 말씀이 "子息도 많고 살날도 많이 남았는데 어찌 지금 財産을 모두 蕩盡하십니까?" 라고 하자 郭再祐將軍님께선 "지금 나라가 倭에 依해 먹힐 狀況이요. 다시 한번 그런 소리를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소" 라고 하니 夫人은 다시는 그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싸운 戰鬪에는 많은 智慧와 꾀로 倭軍을 무찔렀습니다. 그의 義兵들에게 恒常 옻 칠을 한 나무바가지를 달고 다니게 하였는데, 하루는 戰鬪가 끝난 後 쇠 바가지(무게가 10근程度 라고 합니다.)를 놓고 가서 倭軍들을 겁을 주었고 한번은 箱子를 놓았는데 倭軍이 寶物箱子인줄 알고 열었다가 나온 벌들에 依해 魂飛魄散 되었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倭軍 2000名을 죽인 정암진(鼎巖津) 戰鬪는 官軍•義兵 통틀어 壬亂 때 우리가 陸地에서 거둔 첫 勝利였습니다. 우리나라는 三國時代부터 朝鮮 末까지 숱한 外侵을 받았습니다.
朝廷과 官軍이 제 口實을 못해 百姓이 苦痛 받을 때마다 義兵이 나타나 나라를 求했습니다. 上海臨時政府 大統領을 지낸 民族主義 史學者 朴殷植은 이런 義兵 精神을 "우리 民族의 本性(國性)"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느 侵略者에게도 征服當하거나 同化되지 않은 것은 바로 義兵精神이 있었던 德이라고 했습니다.
하얼빈에서 侵略者 伊藤博文을 射殺한 安重根 義士가 스스로 '大韓 義軍 參謀中將'이라고 부른 것도 義兵精神의 延長입니다. 英國 言論人 매켄지(Mackenzie,)는 韓末 日帝 侵略에 맞서는 義兵을 取材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은 몸은 衰弱하고 얼굴은 그을렸으며 疲勞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玲瓏한 눈초리와 自身滿滿한 微笑를 보았을 때 나는 確然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愛國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6月 1日 政府가 國家紀念日로 制定해 처음 맞는 '義兵의 날'입니다. '6月 1日'은 郭再祐가 義兵을 일으킨 1592年 4月 22日을 陽曆으로 換算한 날짜입니다. 나라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危殆로울 때 나라 求하기에 기꺼이 목숨과 財産을 바쳤던 義兵 先祖들의 崇高한 犧牲을 새삼 생각합니다. 이런 義兵이 全혀 必要 없는 나라가 되도록 이끌어야 하는 爲政者의 責任은 얼마나 큰 것일까요.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