なみだ酒-滝 里美 作詩 山田孝雄 作曲 四方章人 編曲 地多孝春
一 雨がしょぽつく こんな夜は まして一人じゃ 心も濡れる どうせ私は 枯れ葉のように 流れて行くのね おんな川 夜に隠れて なみだ酒
二 お酒並べて 酔い知れりゃ やけに淋しい 裏町ギター 押さえ切れない 人恋しさに 忘れてしまった 面影を 思い出させる 夜の雨
三 膝を抱えて 爪を噛む いつかなじんだ 哀しいくせよ 春はいつ来る おんなの胸に 指折り数えりゃ 手に余る 夢をうかべて なみだ酒
金允植의‘儒敎 近代化論’ "儒敎는 德化를 波及한 惠澤이 적지 않으나, 鎖國時代의 專制政治와 階級社會와 尙古主義의 遺物이라."
'大韓每日申報' 1908年 3月 10日字에 실린 內容입니다. 大韓帝國 記에는 西洋의 近代 學問과 思想인 新學을 受容하자는 것이 大勢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新學을 어떠한 範圍로 受容하고 舊學인 儒敎를 어떻게 處理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論爭이 벌어졌습니다.
朴趾源의 孫子로서 實學者로부터 開化思想家로 進化한 朴珪壽는 1870年代에 初期 開化派의 主要 人物을 養成하였는데, 開化派는 1880年代 全般 東道西器派와 變法開化派로 갈라졌습니다. 이 中 東道西器派는 儒敎 道德을 基本으로 삼고 近代 技術을 導入하자는 '儒敎近代化論'으로, 變法開化派는 制度의 包括的 改革을 追求하여 '儒敎批判論'으로 이어졌습니다. 儒敎近代化論의 代表的 人物이 金允植입니다.
金允植은 1881年 營繕司로서 技術留學生 等을 引率하여 中國에 갔었고, 그가 가져온 各種 機械와 書籍은 1883年 機器廠의 創建과 漢城旬報의 發刊에 이바지했습니다. 金允植은 甲申政變 後 要職에 있으면서 各種 開花政策을 推進하고 外交政策에도 力量을 습니다. 그는 또 '護富論'에서 富者를 擁護하고 産業 育成을 主唱했습니다. "西洋에서는 人民이 富裕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데, 우리나라 習俗은 人民이 富者가 될까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金允植은 甲午改革期에 外務大臣으로 拔擢되었다가, 그 後 明成皇后 弑害 事件과 關聯하여 彈劾을 받아 終身流配刑에 處해졌다가 1907年 赦免됐습니다.
金允植은 大同學會 月報의 創刊號(1908)에서 "學者는 仁義 道德을 根本으로 삼아 利用厚生을 圖謀해야 한다"고 主張했습니다. 仁義道德은 全 世界가 모두 崇尙하는데, 儒敎에 詳細히 規定되어 있어 달리 求할 必要가 없다는 것입니다. 金允植은 또 '新學六藝說'에서 "政治 經濟 法律 音樂 等 新學問도 結局 옛날 聖人이 가르친 六藝, 곧 禮義 音樂 활 쏘기 말몰기 글쓰기 算數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新學問의 受容을 主張했습니다. 基督敎를 排斥한 衛正斥邪派와 달리 金允植은 宗敎의 自由를 擁護하고 國民 敎化의 手段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金允植은 朴殷植•張志淵 等과 함께 1909年 創立한 大同敎의 總長이 되었습니다.
1884年 閔氏 勢力의 牽制로 權力으로부터 疎外된 '變法開化派'가 甲申政變을 일으켰는데, 훗날 金允植은 "官職에 있어서 討伐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政變 勢力과 서로 속마음을 通하여 그들이 愛國心에서 그런 것이지 다른 意圖가 없었음을 안다"고 述懷했습니다. 하지만 政變 勢力이 유럽을 높이 받들고 儒敎를 깎아 내린 点은 批判했습니다.
20世紀 近代化 課程에서 儒敎의 影響力은 갈수록 弱化되었고, 近代化 勢力은 一般的으로 儒敎에 批判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敎育重視觀과 强한 家族紐帶는 儒敎文化와 關聯이 깊으며, 이는 近代 經濟發展에 所重한 資産이 되었습니다. 또 儒敎 倫理는 政府政策에 對한 協力, 經濟活動에서 人間關係의 考慮, 企業 組織目標와의 一體化 等의 風土를 造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儒敎資本主義' 또는 '아시아的 價値'라는 用語가 擡頭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