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田園)마을에 현혹(眩惑)된 통한(痛恨)
1990년말 부터인가 부랭이가 전원도시 개발사업 대상지로 유망하다는소문은 들었다.
군내에서 마을진입로등 개발지원사업이 제일 열악한 동내였고 관심도 없는 소외
되고 버림받은 지역같았다. 동내마다 있는 마을회관 경로당 논가은데도 있는 8각형
쉼터 하나 만들어 주지않는 마을이다. 왜 그럴까? 봉성면내 남3리 북4리 동내를 다
훑어봐도 마을진입로 확장포장 안 한곳 없다.
이러한 홀대현상은 지자제(地自制)실시후 더욱 두드려젔다. 선거탓일까? 관(官)의
미움을 산 일이 있었던가? 알만한 군수재직시에 직접 간청도 해봤는데 뒤는 허공중에
뜬 공염불...하기야 그 뒤에 일부 예산이 확보됐을 때도 안해 주었으니까....
그것은 2004년 마을진입로 확장포장공사비 8.000만원이 책정됐다는 말을 믿을만한
곳에서 듣고 당시 류군수실에가서 확인도 했었다. "8.000만원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더니
류군수는 "게속사업으로 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것도 안해준 사실이 있다.
내가 잠시 그곳에 있을때 동내 입구 느티나무터와 앞에 흐르는 하천둑에 걸쳐서 쉼터
라도 있으면 좋겠기에 이를 알아보려고 면사무소를 방문했었다. 마침 그 담당직원이
부랭이 아랫마을에 새집짓고 이사온 분이란다. 어느날 그분을 찾아가 부탁해본 일이
있는데 역시 허사였고 그 이유라도 알려주는 성의도 없어 같은 동내 사는 사람으로서
서운했었다...해주면 안된다는 불문률이라도 있는건지?
이 마을은 "장그래미"라는 도로변마을과 같은 행정구역이다. 모든 복지시설이 여기에
집중돼있다. 겉치래 전시효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은 두 동내간의 거리가 멀어
같이 이용할 수는 없는 지역이다.
이렇게 곱게 안봐주던 동내를 "전원마을"로 개발한다고!...순진한 주민은 그저 동내가
좋아진다는 무지개꿈을 안고 반기다가 엉뚱하게도 선영(先瑩)을 모신 고향산천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었다.
이무렵 나는 고향에 돌아와 앞으로의 꿈을 가다듬고 있었다.
일찍부터 장조카는 옛집이 고향에 있어 퇴임후 내왕하면서 생활하는것이 좋게만 보여
나도 18평짜리 조립식 주택을 마련했었다. 옛생각도 해보고 혈족간의 정도 쌓고 앞으로
할일을 생각하면서.....그러던중 우리 반남박씨 판관공(判官公)파보 편찬사업이 있어 이에
참여했었다. 계파(季派)문중일이나 절사에도 참례하고 족친과도 사귀고 그것을 발판으로
교수공(敎授公)자손의 위치도 찾아 알렸다.
앞으로 형들이 하시던 문중일도 이어받고 성장해가는 아이들에게 종중(宗中)의 역사교육도
계획했었다. 이런 생각으로 인생말년을 즐겁게 봉사하려고 했던 일들이 관(官)에서 하는
일로 인해 모두 무위(無爲)로 끝난날이 와 버렸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지부진의 현안이었던 "전원마을"사업이 시작됐지만 "전원마을"을 조성
안했기때문이다.
회고해보면 전원도시가 되면 골프장이 생기고 다덕과 연결된 관통도로가 나고 사업체유치로
양질의 일자리가 생기며 용수는 상수도 사업으로 해결....그리고 전원마을 전경(全景)과 앞으로
건립될 전원주택의 모형과 가격까지 표시된 청사진도 나와 대대적인 홍보도 했었다. 주민들은
앞으로 철거보상금과 전원주택가격에 상당하는 주택을 구입할것인가? 아니면 대지만 불하받아
신축할것인가?,,,하는 꿈에 부풀기도 했었다. 한편으로는 집단이주 시켜 준다는 말도 돌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퇴임(退任) 노후(老後)는 전원생활을 꿈꿔보는 시류(時流)에 따라 전원마을
입주희망자가 외지에서 버스대절하여 현지에 도착 답사하고 간 사람이 많았으며 동내입구에는
안내 환영 현수막까지 게시했었다. 또 군에서는 이 전원마을 사업계획이 중앙에서 '우수사례"
로 선정되어 두둑한 포상까지 받았다고 들었었다.
이렇게 주민이 부푼 꿈을 안고 있을때는 이 마을을 떠나야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당국
이 그 시행을 늦춤에 따라 서울근교에도 이런 계획이 쏟아지게 되어 그 열기는 점점 시들어갔
었다. 그래도 계획대로 된다 안된다로 몇해를 끌어오다가 토지만 사들이고 대책없이 주민들만
고향을 잃었다. 고의(故意)는 아닐지라도 주민은 보기좋게 기만당한 꼴이됐다.
마을이 전원도시로 더 좋아진다기에 당국의 계획에 승락했지 팔고 떠나라는 전제조건이었다면
안했다.
지금 와서 더욱 회의적인것은 재정자립도도 열악한 지자체(地自體)가 왜 토지매입을 강행했을
까? 전원마을 이야기는 왜 행방불명이고......토지 팔고 나면 비워줘야 하고 주민은 쫓겨나야한다.
결국 이것이 당국의 숨은 속셈이었을까?
당국의 방침이 어떻게 변해서 이런 결과로 종결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초에는 집단이주 시켜
준다. 상수도 진입로 개설등의 논의도 있었다고 들었다. 2008년에 와서는 언제 그런예기있었느
냐고 무시됐고 주민들의 의사따위는 아랑곳없이 행정기관의 보도(寶刀)인 규정대로 토지보상
절차에 따라 방해자 하나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었다, 결국 개별 보상만 주고 받고 사방팔방으
로 흩어지면서 마을은 비워준 꼴이 됐다.
당시 시가로 봐서도 좋고 시골 논때기 황무지로 변할텐데 환전(換錢)되니 좋아서 그랬을까?....
어찌 됐던 지나고 되돌아보면 막장인생의 삶을 보는듯 민망하고 안타까운 역사로 기록됐다.
300년 집성촌(集姓村)의 모습도 함께 사라진 통한(痛恨)의 우거(愚擧)가 됐다.......끝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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