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모공파보(禦侮公派譜)와 두째 형의 급서(急逝)
지난 일이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1990년 큰형님이 필생의 업적으로 그 동안 많이
정리해 놓은 우리 문중의 숭조사업(崇祖事業)기록물과 자손록(子孫錄)을 책으로
엮고 싶어서 여러번 상의해 왔었다.
우리 파(派)만의 일이기에 어모장군파보(禦侮將軍派譜) <註. 10世 珩ㅡ11세 承文
ㅡ12세 海 어모공)로 하고 그 내용은 영주 우물내골 (伊山通) 14세 혁(焃), 거치실(安
定通) 15세 세기(世基) 양위조(兩位祖)의 면봉(緬奉), 석물수립, 비문(碑文)등 문중사업
들을 기록한것들이다. 그 때 나도 형의 뜻이라 여가 있을때마다 성의를 다해 간행하게
됐었다.
그 후 우리 박씨 계파(季派)의 파보편찬에 참여해 보니 그 때 우리 윗대의 계보를 잘못
다룬곳이 조금 있어서 안타깝게 무용지물이 됐었다. 대역사(大役事)로 이룩한 비문들도
차질이 생겨 매몰해 버리고 2001년 아버지 영모비 새울때 같이 면봉전(緬奉前)구비문
(舊碑文)을 서사(書寫)해온 내용대로 사비(私費)로 새로 만들어 세웠다. 그 뜻을 알고 계
시는 세째형님이 경비 일부를 보태주었기에 각각 한기(基)씩 새운것으로 했었디. 사비로
남모르게 한것은 세상 떠나신 두분 형들의 오류(誤謬)로 인한 문중의 뒷말을 덮어 버리기
위해서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묻는이도 없고 모르고 있을 것이다. 지금 되돌
아 봐도 동생이 가신 형들이 이 세상에 머물었던 자리를 살핀것은 당연것으로 여겨진다.
그 어모공파보를 완성하고 책과 함께 대구 가족이 1992,8,15, 고향나드리를 했다.
모두 환대해 주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때 형들이 오셔서 책을 보시면서 환담하고 계실때 "나도 고향에 상징물로서 임야
반정보만 할애해주면 동생과 같이 등기하고 고향에 대한 애착과 형제의 울타리속에
묶이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대가(代價)와 용돈까지 준비하고 갔었는데 마침 창평의
재종숙 기양씨가 와 계셔서 발의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용돈만 전한뒤 오전야수터로
이동했었다.
그후 1개월여가 지나서 청천벽력 같은 두째형의 급서 부음에 망연자실...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던 형이었는데....어머니 모시고 한집에 살면서 많은 사연을
쌓고 지냈는데.....말할 수 없는 슬픔속에 이 일도 무위(無爲)로 끝났었다.
만약 그때 그 일이 성사됐드라면 고향에 대한 소회(所懷)도 소외감 같은 것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는지 모른다.
인생이란 올때는 유순(有順)이요 갈때는 무순(無順)이라더니 두째형이 76세를 못채우
시고 제일 먼저 떠나신후 가슴을 애이는 슬픔과 허탈했던 그 충격파(衝擊波)는 오래도록
이어졌었다.
이젠 먼저 가신 3형제분이 만나고 계실까? 만나면 나눌 사연들이 태산같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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