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형제애(兄弟愛)
근간에 진서(振緖)가 안부를 자주 물어온다. 나이가 들고 보니 피붙이와 고향
이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짝 지어 자식과 함께 한가정을 이루었다. 통 큰 그릇
은 지녔으나 늘 그 그릇을 채우지 못해 동분서주하던 모습 눈에 보이는듯 하다.
클때 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고집도 있고 때론 자기 방어를 위해 주먹도 쓸줄
아는 우리 집안 형제들중 특출한 면을 보여 어른들의 관심을 사며 자랐다.
세월이 흘러 연륜(年輪)이 쌓여짐과 함께 삶의 고민이 한두가지가 아닐텐데
이를 혼자 극복한 뚝심도 보였다. 고향 연고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누구
도 예상 못한 고향과 원격(遠隔)한 호남(湖南)에 삶의 터전을 잡았으니 타고 난
기질(氣質) 그대로다.
천성은 우리 집 전통을 이어 받아 고향을 그리고 동기간 우애를 쌓아 가면서
이세(二世)들에게도 인간의 도리와 뿌리를 깨닫게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
집안의 어른의 자리를 지키고 처신도 반듯하다.
어렵게 생산된 농산물을 고향 가족들과 나눌줄 아는 후한 인심도 보였다.
이제 성장한 착하고 효도하는 자식과 함께 삶을 같이 걱정해 가고 있으니
마음 든든할 것이고 대성의 앞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태생의 통 큰 그릇을 채워라. 장하다.
살아 오면서 큰수술도 했다. 지병(持病)이었던가? 간(肝)기능의 악화가 자식
의 간을 이식하기에 이르렀고 수술이 잘 되어 건강을 회복했다고 하니 대견
스럽다.
수술에 소요된 많은 비용은 가족이 보태 주었고 그중 막내 연서(然緖)가 많
이 보탰다고 들었다. 공무원 생활에서 형제간의 일이라 갸륵한 결단을 내린
것.....고마운 일이다. 어려울때 마다 형을 도운 그 형제애는 널리 본 받을 일이다.
진서(振緖)도 외롭지 않다는 것과 가족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감사 했을 것이다.
이런 사연을 듣고 우리 집 가풍의 진작에 새희망을 보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서(然緖)는 은인자중(隱忍自重)의 고투(苦鬪) 끝에 어려운 공무원 공채에 성공.
평생 공직의 뱐열에 올라 있으니 이것 또한 경박한 요즘 젊은이들의 산 교본(敎
本)같은 존재다.
뒤돌아 보면 연서는 여러 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남의 집 막내는 받고만 자라
나 인격형성(人格形成)에 결함이 있을 수 있으나 연서는 일찍 부터 집안의 전통을
착하게 이어 받았고 집안 일을 스스로 거들며 어른들과의 소통이 남달리 자연스
럽고 자유스러웠다. 사회인이 되고서도 부모의 안부를 보살피고 농촌생활의 불
편을 덜어 주곤 했다. 집안 어른들을 반찬거리 사 들고 찾아가 문안인사도 드릴줄
아는 반듯한 선행을 실천해 왔다. 이런것들은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다. 천성
이 착하고 자기 주위를 소중히 여겼으며 나아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를 사회생
활에 연결했으니 남의 칭찬도 받을만 했었다.
내가 잘 아는 과거 직장 동료가 연서의 "인간돰" 을 극구 칭찬 하면서 성사는 안됐
지만 중매를 자청한 일도 있었다. 남이 내 조카를 칭찬하는데 이 삼촌도 듣기 좋았
고 뿌듯 했었다.
지금 내외가 직장을 같이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 남은 것은 행복한 앞날을 차곡차곡
후회없이 살아가는 거다, 부디 반듯한 마음 간직하고 건강하게 주어진 너의 인생
아끼며 즐겨라. 대견하다.
나도 사회인이 된 연서와 교류한 따뜻한 추억이 있어 적어 놓는다.
타관객지에 살면서 향수에 젖은 고향 송이 맛을 보기란 어려웠다.
어느 해 추석 때인지?..........연서가 다덕까지 가서 상인이 수집해 놓은 송이를 구입
하여 동양초등학교 앞길에서 대기중이던 우리 귀구(歸邱)차량에 칠곡 동생 몫도 같
이 실어 주어서 큰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송이는 갖따온 것이기에 아주
싱싱했고 향이 짖고 맛이 좋았다. 가슴이 찡 하도록 느끼는 것이 있었고 고마움과
함께 아껴 먹었다. 잊쳐지지 않는 추억이다.
특히 봉화중고교와 교육지청에 근무할때는 대구 봉화를 오고 가면서 자주 만나 밥도
같이 많이 먹었다. 세째 형님과도 같이 만났고. 두동 누님과 생질과도 만나 연서의 후
한 대접을 받은 일고 있었지...
또 한번은 승용차 고장수리도 대신해 주어서 고마왔고 한편으로는 따뜻한 혈육의
믿음과 사랑을 느껴 내가 아직 살아 있어 이러한 행복에 젖어 볼수 있는 행운에 감사
했다.
장하다. 착한 연서의 전도(前途)에 관운(官運)과 신운(身運)이 함께 영원하길 빈다. 내
혈육들을 만나고 다닐 때가 나에겐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E
'回顧輯草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옛말일뿐 (李실이) (0) | 2021.09.22 |
---|---|
朴校長의 칠순잔치 (0) | 2021.09.21 |
조카의 도움. 부끄러운 삼촌 (0) | 2021.09.18 |
환고(還故)의 슬픈 그림자 (0) | 2021.09.17 |
장조카 내외 곁에서(경우 결혼축하) (0) | 2021.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