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옛말일뿐 (李실이)
가난의 상징 같은 농촌을 벗어날 수 있는 꿈은 그때의 농촌 젊은이들은 다 가지
고 있었다, 한정된 농토의 수확량으로는 늘어나는 가족을 감당할 수 없기에 농촌
을 떠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새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더 어렵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운이 좋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잡아 새 직장이 생긴 이실이 내외
는 영주에 일찍 정착하고 농촌을 벗어났다. 행운이었다.
빠듯했던 봉급을 받아 이를 쪼게 쓰며 한 가정의 토대를 새로 닦았었다. 남들 처럼
자식의 교육때문에 청춘을 받쳤고. 한 숨 돌리고 나니 또 이 생활고의 고비를 빨리
넘어야 한다는 명제(命題)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명제를 가족과의 수의를 거쳐 가업
(家業)으로 선정하고 승부를 걸어 본 일이 지금의 건축자재 판매업이다. 이 직업이
아들 형제의 적성에도 적중했고 시대적 배경에도 잘 편승되어 일익 번창을 거듭하
는데 성공했었다. 두번재 운도 좋았다.
이렇게 가업에 일찍 성공을 거두었고 든든한 아들 형제를 거느리고 있는 이서방 내
외는 영주로 거처를 옮긴 이 집안의 어른으로서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친정 동생들도 돌보고 대소사의 걱정도 기쁨도 함께하고 있는 모습이 일찍 가신 부
모를 대신하는것 같아 고마운 생각을 해 왔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삼촌이라고 늘 인정을 베풀고 있으니 더 말할것도 없다.
내가 부랭이 생활에서 가장 신나고 활기 넘쳤던 즐거운 추억이 있다. 그것은 조립식
벽돌집에 입주한 이듬해 2002, 4, 28, 화창한 봄날에 맞이한 이서방 회갑잔치날이다.
승용차에 분승하여 묵호 (동해시)까지 갔다. 도착해 보니 예약된 회갑잔치상이 푸짐
하게 준비 되어 있었다.
농촌 출신들이기에 생선회는 못먹어 보고 자랐을텐데.. 낯 설지 않게 잘 먹어 입맛도
시대환경에 따라 빨리 진화된것 같다.
즐거운 정담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귀로에 올랐다. 도중에서 가다 놀다 하면서.....다덕
까지는 왔는데 더 못 가겠다고....기어이 또 저녁잔치가 벌어지고 이어서 노래방을 대절
좁은 골짜기 들어낼듯이 기분 풀이를 했었다.
이서방! 60평생의 노고를 위로 치하해야할 자리가 이렇게 푸짐하게 시간 가는줄도 모르
고 이어졌었다.
李서방! 회갑잔치 잘 해준 가족에게 감사하고 잔치가 풍성했기에 그 보답으로 오늘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손해 안본 잘 한 일이겠지?
늦었지만 건강하게 내외가 해로 할것과 고마왔다는 마음을 남긴다.
일찍 가업을 성공시켜 가정을 일으킨 큰 일을 했기에 옛날 같으면 "여중군자(女中君子)
라 할만하다.
앞으로 더욱 인생을 즐기고 아끼며 살아가자. 항상 그런 모습으로 잘난 박씨 집안의 딸
로써 우뚝 솟아 여한이 없는 삶이 영원토록 이어지길 바란다.
장하다! 동생들 잘 돌봐 줘서 고맙다는 마음 다시 전한다, 李실아!........E
'回顧輯草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갑 생질과의 최후(最後) (0) | 2021.09.22 |
---|---|
형에 대한 회한(懷恨) (0) | 2021.09.22 |
朴校長의 칠순잔치 (0) | 2021.09.21 |
막내의 형제애(兄弟愛) (0) | 2021.09.20 |
조카의 도움. 부끄러운 삼촌 (0) | 2021.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