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고(還故)의 슬픈 그림자
아래 글은 장시간 망서리다가 올렸다. 혹 진실 보다 와전(訛傳)을 막기 위해..
태산 같은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진 충격을 감당 못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마지막 정리라도 하고 떠나고 싶으나 그런 기회도 오지
않았다. 나 또한 실낱 같은 손위의 자존심이 남아있는 탓일까!
그러나 어차피 인생은 빈손! 훌훌 털고 홀가분하게 날아 가련다........202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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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1, 24, 설을 기해 구서 내외가 세배를 왔었다.
그때 큰집 조카가 고향 고가(古家)에 왕래하면서 고향도 지키고 인정도 나누는
모습이 좋아 솔무래집 손질해 방 한칸이라도 꾸려보면 어떨까? 수의했더니 좋다고
했었다.
이를 기화로 자주 고향에 갔었고 겸해서 아버지 영모비를 세우는 일과 함께 5형제
집안이 한데 뭉쳤었다. 그 핵심적 역할을 구서가 했었다. 죽은 후에도 환고향(還故鄕)
하겠다고 묘(墓)자리 까지 확보했었다.
그후 구옥(舊屋)의 수리비가 예상외로 막대하기에 새로 소옥(小屋)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17평 조립식 건물...현관 때문에 1칸 더해 18평이 됐고 모든 일은 구서가 맡아서
해주었었다.
그해 7월 13일 입주하여 7년! 그 7년은 지상천국인줄 알고 살았었다. 행복했었다.
피로 탓인지 늑막염이 발병했으나 공기 좋고 조용한곳이어서 6개월 약 복용하고 건강
을 다시 찾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말을 들었으나 설마! 하고 반신반의 하면서도 잊어버
리고 세월을 보냈었다.
그렇게 지내던 무허가 건물이 철거되고 환전(換錢)되자 그 동안의 풍문들이 노출되어
수질간의 금이 가기 시작했었다. 그 전말을 적어 봐도 하늘 쳐다 보고 춤 뱉는 격이기에
삼가고 결과 몇가지만 추려본다.
그도 공무원으로 늙었으니 할말은 많겠지만 나는 가장 믿고 의지했던 숙질간에 이런
마찰이 생겼음을 부끄러워하고 슬퍼했었다.
까닭으로 문중과 집안과 그 모든 것을 포기했었고 객지에서 칩거하며 인생종말의 여정
을 밝고 있다.
(1) 철거보상금 4,200만원___짓고 입택까지 3,000만원___제하고 1,200만원중 600만원씩.
그 동안 고마왔다는 표시로 주겠다고 제의
(2) 여러 이유로 거절......200만원 더 얹어주면?.............800만원 송금 (2008 ,6, 11)
(3) 2008,10,14. 양도소득세 1,031.080원.. 25일까지 납부해야 한다는 e-mail 받고
납세의무자는 나 인데 뒷말 하기 싫어서 1.031..080원......2008, 10 ,20 ,송금
영수증은 보내 줘야지만 무소식
그리고 1년후 2009, 3, 5. 전화 받았었다. "지난 일들이기에 잊자고 "했다. 평생 상하가
분명한 공무원 생활하다가 정년퇴임한 사람.......
옛날 한집에서 돌보며 살았고 지금도 그런 마음인데............형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과적으로 조상덕에 그 토지의 보상금을 받는 처지인데 ...나 또한 그 피붙이인데도
그 땅에 허락받고 부대조건 없이 건축했다가 회수 하는데 조카 손에 그 일부가 들어
가고 그 대가(代價)는 철석같이 믿었고 자랑했던 숙질간은 소원(疎遠)해지고.........
하늘을 원망했다.
인생말년에 고향땅에서 이루어 보려던 꿈도 버렸고 본래 내 사주팔자가 "祖基不利"
(조기불리)라 했는데 이 계명을 잊어 얻는 화근이라고......자조(自嘲) 한탄(恨嘆)했었다.
이 일에 대해 제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것은 갑서다. 집 지을때 부터 힘드는 일의
도움을 받았고 입주하던날에 고향쌀 한가마를 메다주어 쌀에 대한 개념이 다른 노인으
로서 무한한 따뜻한 가족의 정을 느껴 행복했고 고마왔다.
2008, 4, 22, 한이 되어버린 집을 남기고 마지막 떠날때 살림살이 모두를 그자리에
그대로 두고 왔는데........그리고 다시 가지도 안했다. 그 가재도구를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같이 처리하라고 했어야 옳았다. 그래도 끊지 못할 무슨 미련이 남아 조경수
도 25만원에 팔았다가 그대로 두었고 오가피도...
갑서에게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늙근이 고향이 그리워 돌아갔다가 즐거웠던 시간도 많았지만 이렇게 슬픈 그림자도
남기고 다시 객지로 돌아와버린 한심한 처지가 됐다
대구로 돌아와 우울했던 날 2010,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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