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질녀(姪女)들의 환대(歡待)

bsk5865 2021. 9. 24. 14:56

질녀(姪女)들의 환대(歡待)

 

잠시 고향에 돌아가서 즐거운 새월을 보냈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못해 다시

대구로 영영 돌아오면서 서운한 생각만 쌓였었다.

한때  '이 세상 무슨 재미로 살아 가나" 하고 싫은 생각도 들었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노후대책이니 연금(年金)이니 하는 것들은 부럽기만한

존재들이다. 자식 키워 놓으면 그것으로 평생 함께할 줄 알았고, 공무원 연

금이니 퇴직금이니 하고 사회적인 관심사가 됐을 때는 벌써 공직을 떠난 후

의 일있었다.

 

일할 나이도 벌써 지나고 보니 반갑지도 않는 병원애 갈 일만 생기고 일상이

쓸쓸하기만한 이런 생활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편하지 못한 정서적인 빈틈을 우리 집 딸들의 따뜻한 손짓이 가끔씩

있어 이를 메워준 일이  한편 고맙고 미안 했었다.

 

고향에서 비슷한 나이로 자란 큰집과 작은집의 맏질녀들은 그 삶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큰집 맏질녀는 임서방 사고로 잃고 굳게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3남매 잘 키워

각자의 삶의 길을 열어주어 임씨 가문에 기여했다. 그러나 홀로 겪은 고생탓인

지 먼저 세상을 떠나 안타까운 마음 비길데 없었다.

서울 창동에 살면서 삼풍제지회사에 임서방이 근무할때 임실이와 같이 장조카

면회를 갔으나 정보 미숙으로 허행하고 이를 위해 이틀을 묵으면서 환대를 받았

음을 기억하고 있다.

작은 집 맏질녀는 우서방 먼저 보내고 3남매 훌륭하게 키워 일류 기업에 보냈고

혼자 힘으로 부모의 도리를 다 했으니 그 가문에 출가해 영예를 안긴 우리 집의

장한 맏딸 (맏질녀) 들이다.

이러한 우리 집  딸들의 전통을 이어 받아 세월과 함께 한 가정 남 부럽지 않게

이룩하고 뒤 돌아 볼 여유까지 생겼으니 축복받는 삶이라 칭찬할만한 딸들이다.

 

사람이 늙어 가면서 본래의 자리인 고향. 그때 놀던 곳. 그때 먹던것, 그때의 친

구들이 그리워지는 것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인듯 하다.

인생 말년이 쓸쓸한 것이라면 더욱 옛날이 그립고 돌아가고 싶겠지! 이것이 나

같은 사람이다.

 

고향 근처도 아닌 여기는 아무리 오래 살았다해도 객지이고 정이 가지 않는 곳

이다.  고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우리 대가족과 문중 일을 살펴 봐야 할 처지

였는데.....

 

내가 잠시 고향에 있었던 2001년 초반부터 영주 이실이와 상운 최실이는 자주

교류가 있어 혈육의 정을 이어 왔었다. 즐거운 일도 많았고.....2008년 4월 거기

를 떠나 대구로 영영 돌아온 후로는 만나지 못했으니 그리운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후 가끔 안부를 물어오고 하더니 최실이는 2009년 초에 직접 찾아와 주기도

했었다. 반가왔다.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농사철이 아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원행을 했을것이

다.

더구나 단란하게 잘 살고 있는 세째 임실이도 동행이었고....

임실이는 그 품성이 어릴때 부터 순후하여 보살피기가 수월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또 놀라운것은 최서방과 임서방이 항상 뜻을 같이 해 주고 있어서 고맙기 그지없

었다.

두 질서(姪婿)들은 우리 집 딸들과 한 가족이 되어 고락을 함께한 세월이 반 세기

가 흘렀지만 한결 같이 아껴 주었고 해로하는 모습이 아름다와 늘 고맙게 생각했

었다.

만나서 늙은이 잡비도 보태주고 정성드려 장만한 건강식품을 보내오기도 해 그때

마다 객지 한구석에 살고 있는 고적함을 덜어 주었었다.

 

그런데 특히 임실이는 먹거리에 대한것, 약초에 관한것, 싸이버 광장에서의활동,

스마트 폰을 다루는 솜씨.....언제 그렇게 폭 넓은 재능을 간직했더냐? 노후를 아름

답게 가꾸고 즐기며 보내는 삶이란 본 받을 일이며 자기 발전에 노력한 흔적이 묻

어 있어 보기 좋고 흐뭇한 일이다.

박씨 집안에 멍청한 딸은 없지만..........

 

본시 나는 산골 촌놈이었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 왔지만 지나고 보면 그 때의 것이

그리워졌다. 첫 가을에 맛보는 '송이'는 나의 일등 기호식품이 됐고 많은 추억들이

쌓여있다.

보릿고개에 접어 든 이른 봄이 되면 들에 나가 돋아 나느 어린 새싹을 칼로 도려

베는 '칼나물'의 싸근했던 맛! 방언 그대로 나생이, 꽃따생이, 씀바귀, 질경이, 엉구

생이, 원추리, 돌나물, 쑥, .....등으로 춘곤을 덜었고 , 야산에 산나물이 나면 기를

쓰고 뜯어 먹었다.  이어 산나물의 최고봉인 큰산 나물이 나고....

각기 조금씩 다른 맛을 아직도 향수와 함께 기억하고 있다. 시레기 국이 지금도

정겹고 콩잎, 팥잎도 겨울에 많이 먹고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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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집에서 이러한 먹거리 환경에서 자란 이(李)실이는 누구 보다도 내 식성을 이해

하고 있었다. 늙어 옛것이 정겨워지는 것도 짐작하고 있기에 이러한 것들을 때에

따라 조금씩 갖추어 보내 주었었다. 고향쌀도 오랫동안 겯드리면서.......

나의 미각은 그 시대를 섭렵해 가며 많은 행복을 누렀다. 이 세상 누가 뒷방 늙은이

의 입맛을 되살려줄 수 있나!

 

큰산 나물을 맛 보며 그 그윽한 향기에 취했고, 머구(머위)반찬을 먹으며 농사철 일꾼

들의 밥상이 생각났다, 쑥 향기 맡으며 먼 그 옛날 쑥을 뜯어 담을 작은 다래끼를 멘

어머니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 맛이 일품인 자연산 '곰치'를 먹으면서 이 한잎을 뜯을 때의 기쁨을 연상했다.

참 많이 고마왔다. 그리고 행복했었다.

 

이(李)서방! 우리 집 가족이 된후 오랜 세월이 흘렀고 특히 곁에 같이 살았기에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받았네. 집안의 힘든 일은 아직도 혼자 맡고 있어 고맙고  든든

했네. 이젠 같이 늙어 가는 처지지만 나는 젊었던 시절의 이서방만 기억하고 싶네.

 

이 세상 끝자락을 살면서 그대들이 곁에 있어 행복했다. 출가 외인이란 말은 박씨 집

안엔 안 통하는 말이됐고 고운 마음씨를 지닌 그들에겐 길이 축복있으리라......

우리 딸들 !  장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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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後記)

우리집에 남은 가족중에 제일 연장자로 할일을 못함이 늘 부끄러웠지만 마음이야

항상 초심(初心)의 그 자리에 머물고 있기에 괴로움만 더할 뿐이었다.

이젠 정말 많이 늙었다. 건강상태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것 같고, 아주 나빠질 전조

(前兆)처럼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고 있음이 근황(近況)이다.

 

모두 그렇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믿고 편안한 곳은 내 혈육이기에 그 혈육의

소중함을 일찍 부터 간직하고 살아온듯 하다. 가족은 물론 문중까지도.....

다만 선천적으로 표현이 서툴고 또 어려운 시대를 살아 왔기 때문에 물질을 통한

정(情)의 표시는 못했던 과거를 지니고 있다.

 

생활환경이 바뀐 인생말년에 혈친이야 많지만 그 중에서 불우해진 나와 교류하면서

살아 준 딸들의 따뜻한 인정이 눈물겹도록  고맙기에 내 처지의 생각과 곁드린 것이니

맑은 거울 처럼 잘 비춰졌으면 좋겠다..........2020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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