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세째 형과 작별(作別)하고

bsk5865 2021. 9. 23. 06:19

세째 형과 작별(作別)하고

 

그 동안 의지하고 지냈던 하나뿐인 형님도 내가 부랭이를 떠난 후 오랫동안

적조(積阻) 했다가 소식 들은 것은 요양병원에 계신단는 것.......충격적이긴 하나

현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모두가 그길로 가고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을 것

으로 생각했었다.

 

새로 집 지어 동구(洞口)밖으로 이사한 뒤 형수님을 여의고 15년! 그 15년을 막

내 내외가 그 많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잘 봉양했었다. 가신 형수님의 보살핌

없이 홀로 지낸 세월이 참 길었고 말년엔 남의 손의 시중을 받으며

노쇠(老衰)를 견디어 나가셨다.

 

2011년 봄에 만났을 때는 백발은 늘었으나 서로 소통이 되었고 두동(杜洞)

큰생질 지난 겨울에 영영 떠났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안동병원으로 옮기

신 후에는 식물인간 처럼 변해 계서셔 "이것이 이 세상에서 볼 마지막 모습"

이란 생각에 밖으로 나와 눈물을 삼켰다. 같이 간 동생은 의식이 조금이라도

돌아 올가 하고 여러 곳을 만져 보았으나 허사였다. 눈은 깜박거리는데 아무런

반응 없이 누어만 계시다가 2012년 5월에 운명(殞命)했으니 90세를 못채우셨다.

 

형님은 우리 형제중에 제일 근골(筋骨)이  장대(壯大)하시고 선천적으로 건강은

타고 났는데 내장수술도 했고 호주가(好酒家)였지만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시대를 잘못 만나 일제징병(日帝徵兵)에  6,25전쟁에  모두 출정(出征)했으니

형수님의 시름이 얼머나 컸었을까?   다행이 자식 복은 타고 났기에 모두 자수

성가(自手成家)하여 가난의 굴레는 벗었다.  특히 막내는 근대 물결에 잘 적응

억척과 근면으로 제일 가는 부호(富戶)의 소리를 듣고 살았으니 가난의 한은 풀

어 드렸다. 또 그 영광을 이룬 막내 내외를 늘 자랑스러워했었다.

 

또 이 집안에 자랑스러운 것은 사위 한(韓)서방이다. 옹서지간(翁婿之間)이지만

그 동안 베푼 인정도 남달리 돈독하였고 그날 장지(葬地)에서 나하고 나눈 대화

(對話)의 반은 눈물이요 반은 회한(悔恨)이었다. 인생의 마지막을 잘 풀어드리지

못함이 죄스러워 흐느끼는 그 진실을 우리는 명심하고 오래오래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사위가 있다는 것도 형님의 북일 것이다.

 

형님 상사를 끝까지 지키고 돌봐야함이 당연했으나 잊쳐지지 않는 부랭이에서

마지막에 있었던 일이 다시 살아나 견디기 힘들어 초우제 올리고 돌아 왔었다.

집에와 잠 못이루며 괴로움으로 방황했었다. 내가 왜 이럴까! 자문자답(自問自

答)하면서....

두고두고 조카들의 책망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어른으로서의 체통도 지키지

못한 부그러움을 뉘우치기도 했었다.

 

내가 철 들어 형님과의 이 세상에서 만남이 80년이 흘렀지만 영원한 작별의 순

간은 이렇게 허무했었다. 편안히 가시라는 말 한마디 건낼 기회도 못 갖는 것이

우리네 삶인지?......형을 추모하면서..(2013,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