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가(分家)의 기억
분가(分家)......옛날에는 "살림 난다" 고 했다.
그시절의 집이란모두 토담집이었고 목조(木造)건물로는 내 출생하던 해에 우리 집
본채를 허물고 목조로 새로 지었다고 들었으니 큰 관심사였을 것이고 나와는 동갑
인 셈니다.
내가 철 들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앞의 밤실형님집 사랑채와 뒷집 성곡할배가 거처
하시던 사랑채가 목조였다.
제일 큰 규모의 집은 종가집이었고 "까치구멍집"이라고 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천아재 집터에 있었다.
우리 집의 분가 시기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우리집 분가는 요즘 세대의 분가와는 달리 좀 특이(特異)했었다.
단지(單只) 한집에 식구가 많아 식생활을 따로 하는것 외는 별로 다른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나누어서 자식들을 관리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머니가
두째 아들 내외, 나와 동생을 데리도 나가 그 앞집에서 식생활을 따로 했다.
새로 맞은 며느리는 일이 많아 분가된 집을 떠나지는 않겠지만 그 외는 숟가락
놓고는 큰집 사랑방에서 생활했었다.
내 희미한 기억으로는 앞집으로 분가하기 이전에도 분가한 일이 있었는듯 하다.
옛날에 보랄댁은 내려가는 길 바로 밑에 있었고 그 집 위쪽에 있는 밭에 방 2칸의
부엌이 딸린 토담집이 한채 있었다.
그 집 마당에서 어머니가 배를매고 계시는 곁에서 놀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마
그 집에서도 잠시 살았던것 같다.
*배를 매는 일.....무명으로 옷감을 짜는 일의 한 과정(過程)으로 날줄에 풀을 칠하고
밑에 불을 놓아 말려서 "도투마리"라는 기구에 감는 작업
큰집 식구는 아버지를 위시하여 큰형님 내외분과 내 위의 남매들이 같이 있게 했었
고 어미니와 두째 형님 내외분 그리고 나와 동생이 분가된 식구가 된 셈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하루라도 자식들의 얼굴 안보시고는 못견디시는 어른이셨기에
지식들도 여기에 순응했었고 늘 가까이서 모시고 살았으니 분가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자식대(代), 손자대(代) 까지 내려오면서 여러집으로 분가하여 새로운
세대(世帶)를 이루고 살고 있지만 우리 아버지는 달리 이러한 방식으로 분가 시켜
자식은 여전이 곁에 두고 매일 얼굴 보시면서 살았었다.
만약 안보이는 얼굴이 있다면 "야는 어디 갔느냐?" 고 물으시곤 했었다.
가끔 내리시는 불호령이 무서워 집을 떠날때 들어 왔을때는 반드시 공손히 말씀
드려야 했다. 이렇게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의 샐활은 철저했었다.
그 당시에는 그저 그르려니 하고 살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장성한 자식
이라도 늘 품안에 브듬고 지키고 계시던 그 깊은 속마음을 헤아려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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