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 그리고 귀한 손자 여섯
흔이 세상 사람들은 "외가집에 온듯한 편안함".....이런 표현을 쓴다.
그러나 내 손자들은 그렇지 못한것 같다.
외가란 특히 외조부모 생존시에 드나들면서 집에서 누리지 못한 자유? 를 만끽해 보기도
하고 어릴때의 추억도 쌓는 곳일수도......
나는 외가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는게 없다. 가끔 오셨던 외삼촌의 긴얼굴과 수염
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자식은 집에서도 사랑 속에서 크지만 조부모의 각별한 사랑은 거의 맹목적(盲目的)인지도
모른다. 옛부터 벽장에 숨겨 뒀던 제상(祭床)에 올릴 곶감을 몰래 찾아 먹어버려도 눈 감아
주고 내 집처럼 휘졌고 다니면서 난장판을 만들어도 예쁘게만 보는 것이 조부모의 눈길일
것이다.
내 손자들은 외손녀 부터 봤다. 그때 "나도 이제 할아버지가 됐다."고 인생의 한 지점을
넘어선 것이기에 늙어 감을 실감했다. "할아버지"란 늙었음을 상징하는 말이니까......
어릴때는 남매가 외가 와서 놀다가 자고 가기도 했고 두째딸 남매도 어릴때는 오면 자고
가겠다고 조르기도 했었다.
조금 커서는 시대가 겪게 하는 아이들의 불행이 시작되서 뭐 배우고, 또 뭐도 배우고.....
시간에 쫓기며 엄마와의 전쟁통에 외가고 뭐고 관심 밖으로.....
더구나 원거리에 있는 손자들은 더 얼굴 볼 기회가 없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행차? 하는 일
없고 그것도 공부가 앞선 후순위다.
대학에 들어 가고 조금은 자유의 몸?이 된 민지가 간혹 오면 생후 밤낮을 구별 못해 할머니를
괴롭혔던 그 방에서 할머니와 놀다 자고 가기도 했다.
조부모의 생각은 손자란 한밤중에 "할머니"하고 문을 두드려도 반가운 존재들이다. 이런 기쁨
누리고 사는 늙은이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간혹 듣는데 별천지에서 사는 사람 같이 보였다.
우리 손자들과 소원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할아버지의 사랑 표현이 서툴고, 다음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지극히 제한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년에 몇번 만나나? 손 꼽을 정도 ...... 명절이 유일(唯一), 그 다음은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원가리 손자들은....
우리 속담에 "눈에 멀면 마음에도 멀어진다."고 했듯이 그져 혈통상으로만 손자가 될까 두렵다.
....세상은 이렇게 삭막하게 변해 버렸다.
반대했던 호주제(戶主制)도 없어 진지 오래 됐고 핵가족 시대로 변한지도 오래이고 생존경쟁이
치렬한 세상를 살아 가는 것만도 벅차지만......그래도 잠고대 같은 소리는 결코 아니다.
이제 까지 살아 오면서 조손간(祖孫間)에서만 불수있는 사랑을 봐서 알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혜정이와 함께 잠시 느끼고 누려 봤을 뿐 아쉬움만 남아있다.
커서 철들어 그것 까지 보상 받을 수 있도록 세상에 머물고 있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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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귀한 손자들>
우리 3남매는 가기 남매를 두어 차세대(次世代)들은 6명이다.
성장과정도 성장환경도 대도시에서 자랐기 대문에 비슷하며 남이 하는 것은 거의 다 해보고
자란 축복 받은 세대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같을 수는 없고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격체로 성장했다.
모두 4년제 대학에 들어가 졸업했거나 재학중이다.
손자들은 군복무도 끝나 병역의 의무를 이행한 대한민국의 씩씩한 청년으로 어디간들 손색
없는 유능한 인재들이기에 보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함을 자랑 하고파 진다.
대학을 졸업한 손자 손녀는 빠르게도 제각기의 인생역정을 가고 있다. 영어가 능통한 맏손녀
혜정이는 우리 나라 굴지의 여행사에서 간부급에 올라있고 외국을 이웃집 다니듯 하기에 외국
바람이 몸에 베인듯 남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결혼하여 딸과 셋식구! 내집인 새 아파트에서
행복을 구가하는 서울시민이 됐다.
맏손녀의 운과 활동력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왕성했었다. 외국 유학이 끝나 귀국 후
에는 지방대학에서 서울의 대학으로 편입학 졸업 하더니 취직 시험을 봤다. 그것도 몇곳에
합격했고 그 중에서 골라 간 곳이 지금의 직장이다.
서울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자력으로 해결했으며 차세대의 첫번째 사회진출은
이렇게 잘 풀려나가 자립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로 인한 부모의 걱정도 덜어 주어 기쁘고
장하고 기특했다.
외국 바람을 타본 사람은 사회활동에서 생각의 폭이 넓고 활동력, 성취욕도 다른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었다.
특히 외조부모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기에 늘 고맙게 생각하며 살았고 행복했다. 송비에게도
어릴때 부터 상할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카드를 쓰게하여
보내주기도 했었지.....
해외여행때는 좋은 상품 알선해 주었었고.......특히 맏손녀와는 일일이 열거할수 없는 추억들이
쌓여 있다.
동생 영목이는 대학을 나와 진로를 고민하다가 뜻한바 있어 일찍 자영업에 도전했다. 옛날과 달리
고학력의 사고(思考)와, 시대조류, 그리고 자기 개성과 능력, 취향등을 기반으로 장고(長考)를
거듭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은 어디까지나 자기 것이다" 하지만 부모세대와 공존해야할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는 것을 우리 차세대(次世代)들은 깨닫고 좀 더 지혜로운 처신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어릴 때 부터 만나면 인사할줄 알고 늙은이 보호할줄도 아는 범절이 대견해 우리들이 클때
시골에서 친척분들을 대하던 모습을 연상해 보기도 했었다.
말 없이 자기일 챙기고 스스로 헤쳐나가려는 강한 면이 있어 외부 환경과의 조화에 금이 생길까
두렵기도 했었다.
훤출한 외모로 건강하게 성장했으니 어디에 나가도 손색없는 젊은이다.
건강한 체격과 정신,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만난에 부디쳐 보자.
젊음은 다시 되돌아 오질 않는다.
인생길! 이제 시직이라 모든 것을 겪어 보고서 최선의 것은 자기 것으로 소화 축적하고 대성
(大成)의 길잡이로 삼아 미래에 나타날 대로(大路)에서 활주하는 그 날을 기다려 본다.
대사업가로 변신한 늠름한 모습을.....힘 내서 밀고 나가자!. 가족은 너의 앞날을 항상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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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두째인 아들은 일찍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손자, 손녀의 순으로 세싱에 태어닌 2세들을 잘
키웠지만 대구 조부모와의 거리는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나와 손자 찬제 나이와의 간극은 60년,
즉 내 나이에 60을 빼면 손자 나이다.
손자는 어릴때 명절에 애비 따라 내 고향에 다녔었다. 그 때 명절 제사 올리고 선산에 성묘 다니고
재종 형들의 귀여움도 받고 했었다. 지금 이런 것 기억하고 있을는지......
자기 존재의 근본을 자각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만들지도 못해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애비의 4촌형제(從兄弟)는 9명이고 너에겐 5촌아저씨(從叔, 當叔)가 되고 , 그 아랫대(代)는 너와는
6촌형제 (再從兄弟)가 되는 가장 가까운 친족들이다.
애비는 형제가 없기에 4촌은 없고, 고모집엔 고종4촌, 이모집엔 이종4촌, 외가엔 외4촌이 있다.
현대를 살아 가는 젊은이들은 관심도 없는듯하나 이는 인간이 어울려 가족이 되고 끈끈한 혈연으로
얽혀 있으며 자신의 존재도 그 속의 일부분이다.
우리 차세대(次世代) 6명의 상호간의 관계, 호칭도 위의 것민 알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다. 모두
4촌 형제, 자매간이기에 험한 세상 서로 아껴주고 도우며 살아 가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손자 찬제는 자기 진로에 대한 고민을 누구와도 상의한바 없이 자력으로 관철 성취한
끈기를 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런 저력을 지닌줄도 몰라 본 어른들이 부끄러웠다. 졸업후의
취업문제가 내심 걱정이 되는 것은 부모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회사의 내용은 잘 모르지만 그 회사를 선택하고 입사시험을 거쳐 회사원이 되기까지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혼자 감내해 부모의 걱정을 덜어 주었었다. "내 인생 내 힘으로 개척해 나간다."는 자립정신이
투철해서 그런 것일까? "커가는 아이들의 앞일은 누구도 모른다."는 말을 실감 했다.
또 요즘 결혼하고 싶은 여자친구가 있어 한번 집으로 대리고 오겠다는 이야기가 들여왔다. 이러다기
결혼문제 까지 순탄하게 풀려 주위의 기쁨을 안겨 줄것 같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한 어른들의 믿음을 샀다는 것이 든든하고 대견했다.
이 믿음!. 평생 지켜 나갈 것이라고 할아버지는 알고 믿고 떠나련다......
친탁해서 그런지 붙임성도 없고 과묵하며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하는 풍경만 보아 보아 왔으니 겉보기
와 다른 그 내면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어느날 첫월급이라며 용돈을 보내 왔다.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서 받은 급료.....
여기 가지 오는 길에 별로 보탬이 되것도 없는데.....
고맙고 그냥 써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안방에 작은 TV수상기를 장만해 두었다.
앞으로 유능한 경영인으로 성공하길 바란다.
동생 손녀 찬아는 아직 대학에 재학중이다. 서울에서 컸고 대구 내왕도 명절 아니면 별로 없었기에
오빠 보다도 더 만날 기회가 드물었다. 조부모의 귀여움도 받고 응석도 부리면서 커가는 그런 환경은
아니었지만 외조부의 사랑은 듬뿍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찌 부터 하고 싶은것 하고 살기 위해 앞날을 걱정했었고 재수를 해 가면서 기어이 가고 싶었던
미대 (美大)에 들어 갔다.
착실하고 악착 같은 기질도 보여 앞으로 큰것을 꼭 이루고서야 잠시 머출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요즘 가정이 다 그러하지만 집안의 꽃같은 존재로 삶에 지친 부모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청량제로
귀여움을 받고 있다.
미대를 졸업하고 사회 진출하는 그 날 까지 살아 있을는지 모르겠다.
가쁜 날 좋은 날이 어서 오길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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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먹내눈 손녀 손자의 순으로 2세(世)들이 태어 났다. 대구에서 늘 내왕했고 자주 만나 이들이 커가는
과정도 잘 알고 있는 외손들이다.
막내는 이들 남매에게 쏟은 정성과 노력과 눈물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인생을
여기에 다 받친듯 했다.
다른 집도 나매를 키운 부모는 다 그렇게 소중하게 키웠지만....
신암동 집 내실에서 세상살이를 시작한 손녀 민지는 낮엔 자고 밤엔 울어 산후 조리하는 애미를 고생
시켰었다.
엄마의 욕구는 무한대(無限大)인가 보다.........유치원 시대 부터 가르치고 싶은게 많았다. 남 보다 더 훌륭
하게 키우고 싶다는것!
지금 지니고 있는 재능은 본인의 바탕과 노력에 엄마의 지극 정성이 합친 것이라고 하고 싶다.
이들 남매의 청소년기에 가장 큰 고비는 영어권 나라에 유학하고 2004년 7월에 돌아 온 일이다. 누구나
갈 수 있는건 아니었고 여기에 동행한 맏손녀 혜정이도 함께 유학하고 귀국했다.
현지 학교에서 그들과 어울려 생활하면서 배운 외국어가 현실에서 큰 도움이 되어 주었고 이를 누리고
있는 이면에는 이국에서 너희들 뒷발라지해 준 엄마의 고생과 그 자금을 조달한 아빠의 고생이 있었다
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말도 안 통하고 모든 것이 낯선 이국땅에서 남 몰래 흘린 눈물의 대가다.
귀국하고 (2004,7) 대구 학교에 복귀 졸업한 뒤 대학 시험에 경북대와 서울 외대에 합격하여 선택의
기로에 섰다. 결국 서울을 택했고 이로 부터 객지 유학이 시작 됐었다.
세월이 흘러 졸업후에 취엄난이 극심해 우선 임시직이라도 찾다가 중앙일보사에 나가더니 조금후
문공부 산하 해외문화홍보 기자(記者)로 변신 마음껏 영어 실력을 과시했었다.
이 기사가 동영상으로 youtube 에 올려지고 카톡으로 전송되어 집에서 본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신기해서 보고 또 보고.....말은 알아 듣지 못하지만.......
직장인이 됐다고 월급에서 용돈이 입금됐다. 오래 살고 보니 별호강을 다 하면서 살았다.
반갑고 고맙고 대견하고.......
이를 합쳐서 내실에 에어콘을 가설했고 여름을 수월하게 넘기고 있다.
할머니에게 전화도 자주 하고 그 전화 받는 즐거움이 하루의 수고로움을 잊게 해주었다.
나는 조손간 정겨운 교류를 보기만 해도 흐뭇했었다. 오래 오래도록.........
또 깜짝 놀랄 변신을 했다. 2021년에 당당한 서울특별시 7급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주위에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본인은 그 직장이 좋아 신바람을 날리고 있다. 오늘도 또 내일도..............
이집 두째 손자 주성이와 맏이 민지는 모두 친탁해서 어릴때 부터 우리와는 다른 면이 많았다.
활달하고, 대담하고, 고집도 세고, 주관도 뚜렸하고......
이러한 성격 탓에 조기 교육이 어려웠던 점도 있었고 엄마의 속도 많이 샹했을 것이다.
학교교육이 시작 되고서도 부모의 보살핌이 남달리 컸으며 4년제 대학에 들어 가고서야 한시름
놓았었다.
동시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 보다 더 일찍 부터 쌓은 것이 빛을 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이무렵 군복무도 마쳤다. 세상 물정에도 밝아지고 어른스러워 졌다.
하고싶은것, 취향(趣向)에도 맞고 재미도 있고한 최첨단 기기에 심취되어 이에 내재(內在)된
실력은 언제 부터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상류수준에 오른듯 했다.
아직 재학중이지만 조교를 맡아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방면에서는 장래가 촉망 된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야말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기질인 보배를 몰라보고 일찍 부터 과욕을 탐한 것은 아닌지?
집에서는 아빠를 잘 보살피고 가사를 돌봐 주는 든든한 아들로 효도의 큰길에 나선 것이다.
이 얼마나 장하고 기뻐할 일인가? 역시 커가는 아이들의 앞날은 누구도 모른다.
김서방 말처럼 통크게 "제대로 자라게 던져 두라"고 한 말이 정답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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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後記)
주위의 각광을 받던 주성이의 대학 생활도 끝날 무렵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유망기업에 현장
실습을 겸한 알바 근무도 호평속에 마쳤다.
졸업후에 이 기업에 취업해도 좋겠다는 후일담이 들리더니 사원모집에 응시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취업이 어려워 방황하느 틈도 없어졌고 행운의 신(神)은 늘 주성이 편에 있었다.
2021, 2, 7, 일요일 설을 며칠 앞두고 김실이 내외의 외식 초대를 받았다. 모처럼 바깥 나드리로
마음이 들떠 있었는데 주성이가 먼저 찾아 왔었다.
"할아버지, 제 첫월급 탔어요" 하고 봉투를 각각 주고 떠났다. 환한 밝은 모습과 어른스러우움과
신바람 나는 기쁨을 남기고..........
오랫만의 외식 나드리에 기뻤고 어릴 때부터 지켜 봤던 손자가 직장인으로 변신하여 첫 보수를
나누어 받아 기쁨을 더했으니 이 날은 꼭 기념해야할 특별한 날이 됐었다.
성장하는 전과정을 함께 했던 두 늙은이의 이 날의 감회를 깊이 묻어두고 오래도록 이어 가기
위해 이것을 모아 보태서 반지를 만들었다.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 반지의 깊고 기쁜
내력이이어질 것이다. 오래 오래 오래도록........
장하다, 고맙다, 유능한 직장인으로 성장하여라............(2021, 2,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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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次世代)의 여섯 손자들은 나의 분신이다.
이 세상에 와서 남기고 가는 상징적인 귀중한 존재들이다.
이 보물들이 여기까지 잘 자라준 것만 해도 나에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살아가는 앞길에도 각자의 길이 다를지라도 늘 행운이 함게 하길 기원하고 있다.
2018년 11월에 내가 마지막 일본여행을 즐긴것은 온 가족이 이를 도와 성사시킨 결과로 그
따뜻한 마음들을 오래 기억 할 것이다.
9순을 맞는 날에도 모든일 멈추고 어린 송비까지 모두가 같이 어울려서 분에 넘치는 축하를
받았었지.....
그렇지만 나는 너희들이 이 만큼 클때 까지 도와 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먼 곳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던 늙은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란 존칭으로 늘 마음을 써준 너희들이 훌륭했고 나는 빈손으로 귀중한
보배들인 손자 여섯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많은 행복을 누렸었다.......(2021,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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