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 보고, 꿈도 품고
시골 중학교에서 전교 수석으로 촉망을 받고 있을때도 집에 와서는 내색치 않고 ,동생이
우산 전해 주려고 학교에 갔다가 복도에 사진과 함께 게시된 내용을 보고 알았을 정도로
과묵했었다.
출신학교 내신성적이 좋아서 그런지 대구 청구고(靑丘高校)에서 우등생이 많은 반으로
편성된 모양.......하숙 시켜 놓고 1년뒤 엄마는 너만 바라보고 혼자 대구에 왔던 것이
가족 전체가 이주하게 된 계기가 됐었다.
이사를 일곱번이나 다니면서 "집안의 앞날을 열어갈 주역(主役)"이 될 것이라고 믿어
엄마는 고달픔도 잊고 그 뒷바라지에 골몰 했었다. 대학의 학과 선택도 남의 자문을 얻어
결정했을 정도로 신중했고........
졸업과 동시에 삼성(三星)에서 대려 갔고 삼성인이 되고 부터 대덕과학단지에 파견 연구
하는 기회도 얻어 삼성인(三星人)으로서의 기대가 컸던 것은 우리 가족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사정을 아는 고향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까........
대학 들어 갈때 입학금도 손서방이 거들어 주었었다. 졸업후 신입사원 극기훈련(克己訓練)도
마치고 구미(龜尾)로 발령 받아 집에서 회사 버스로 출퇴근 했을때가 제일 부모로서는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엄마도 고생의 큰 고비를 넘겨 그 고생에 대한 보람에 만족 했었고 또 앞날에 대한 푸른
꿈을 안은채 안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찍 결혼 상대자가 있어 상대방에서 성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어느날 오후 사돈 될 분과 초대면한 기회가 있었다.
만나서 나눈 이야기는 얼마간 협조할 수 있으니 집 마련하고 결혼 지금 시키면 어떨까? .....
고맙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 1년 뒤로 미룹시다. (그때 아파트 청약해 놓은 상태)
대화의 골자는 예상대로 빨리 결혼 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유학을 희망
하면 보내 주겠다는것과 사돈의 지난 고생담을 들었었다.
강인한 성격에 자수성가(自手成家)한 분이란 인상과 믿음도 갔다.
그후 아들의 결혼은 새아파트로 이사를 1988년 12월에 하고 이듬해 1989, 4, 23, 수성호텔
에서 결혼식을 올렸었다.
원거리에서 와 준 고향 어른, 친인척 분들에게는 미안했고 고마왔다.
결혼후 근무지 구미에서 신혼생활이 시작되고 애지중지했던 자식은 부모의 품을 떠났었다.
세상 부모가 모두 그렇지만 아들 딸 짝지워 모낼때 허전한 마음 어디다 비할수 있겠는가?....
그저 꾹 참고 잘 살아 줄 것을 기도하며 새월을 보냈었지.........
고생은 했지만 부모로서는 여기까지 온것으로 할 일 다 했다고 만족했고 앞일은 이제 너희들
몫이며 자신은 물론 가문의 명운도 여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새기고 살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럴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리고 늙고 쓸모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 부모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길........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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