劍ひとすじ-美空ひばり///宮本武藏と嘉納治五郞(D)|★....엔카 게시판
劍ひとすじ-美空ひばり 作詞 石本美由起 作曲 伊藤雪彦 編曲 佐伯 亮
一 剣は相手を 倒せるけれど 人の心は 斬られない 強いばかりが 勝じゃない 泣ける弱さが 人間なのさ 淋しさが ああ 淋しさが 白刃を染める
二 剣は勝っても いつかは亡ぶ これは果かない 世の定め 待つか 進むか 退くか 耐えて貫く 孤独の旅路 ひとすじの ああ ひとすじの 男の道よ
三 剣は勝っても いつかは亡ぶ これは果かない 世の定め 待つか 進むか 退くか 耐えて貫く 孤独の旅路 ひとすじの ああ ひとすじの 男の道よ
宮本武藏と嘉納治五郞 日本을 代表하는 스포츠인 柔道와 劍道에 많은 影響을 준 最强의 검호 ‘宮本武蔵(みやもとむさし. 1584?~1645年)’와 柔道의 아버지‘嘉納治五郎(かのうじころう. 1860~1938年)를 紹介합니다.
올해부터 日本의 中學校에서는 새로운 學習 指導 要領이 導入되어 保健體育分野에서 柔道,劍道,相撲가 必修科目이 되었습니다. 日本 固有의 武術 柔道는 올림픽 正式 種目으로 指定된 世界的인 스포츠이고 劍道도 世界化되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中學生들이 學業뿐만 아니라 運動에도 힘써 ‘文武両道(ぶんぶりょうどう. 學業과 武藝(스포츠)에 모두 뛰어남)’를 갖춘 世界的인 人才로 자라 나기를 期待하는 것이겠지요. 이에 紹介할 宮本武蔵와 嘉納治五郎는 모두 ‘文武両道’에 뛰어났던 人物입니다.
平生負けない武士,宮本武蔵 宮本武蔵라고 하면 먼저 二刀流(にとうりゅう). 兩손에 긴 칼과 짧은 칼을 들고 씨우는 劍法)를 만든 사람이라는 것,또 平生 69번을 싸웠지만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것,그리고 有名한 著書 「五輪書(ごりんのしょ)」等이 떠오릅니다.
워낙 수수께끼가 많은 人物이라 全部 事實인지는 分明하지 않지만 一般的으로 伝해지는 武蔵의 生涯에 對해 알아봅시다. 武蔵는 兵庫県 出身이라는 說이 有力하지만 岡山県에 있는 宮本村(みやもとむら)에서 태어났다는 說도 있습니다. 後者는 人氣 作家 吉川栄治(よしかわえいじ 1892~1962년)가 쓴 小說 「宮本武蔵」에 나와 널리 퍼졌는데 岡山県에서는 ‘宮本武蔵의 故鄕’으로서 觀光 開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生年月日도 分明하지 않은데요. 普通 戰國時代(1467~1568年)가 끝나고 江戸時代 (1600~1867年)로 넘어갈 무렵으로 여겨집니다.
‘不敗 武蔵’에 對한 이야기는 그가 直接 쓴 武道書『五輪書』에 나와 있는데요. 13歲 때 처음으로 決鬪에서 이긴 以來, 21歲 때는 京都에서 幕府의 劍術 師範을 하고 있던 有名 兵法家(へいほうか. 武藝를 가르치며 살았던 武術家) 一族과 싸워 모두 이겼으며 29歲까지 60番 이상 決鬪를 해 모두 이겼다고 합니다.
武蔵의 決鬪 中 가장 有名한 것은 ‘巌流島の決闘(がんりゅうじまのけっとう)’인데요. 巌流島는 山口県에 있는 작은 섬으로 武蔵는 이곳에서 ‘巌流’라는 兵法의 達人과 決鬪를 벌입니다.‘巌流’는 길이가 3尺이나 되는 真剣을 들고 온갖 劍術을 使用해 勝負를 펼쳤는데요. 武蔵는 木劍으로 단 一擊에 그를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 섬을 ‘巌流島’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江戸時代 庶民에게 무척 사랑 받은 武勇談으로 演劇,浄瑠璃(じょううり:伴奏에 맞추어 억양과 가락을 붙여 엮어 나가는 이야기) ,浮世絵(うきよえ. 風俗畵) 等으로 製作되었고 지금도 小說,映畵,텔레비전 드라마 等 多樣한 形態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現代 日本人이 가지고 있는 宮本武蔵에 對한 이미지는 이러한 作品의 影響이 무척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當時 日本 男性의 平均 身長은 160센티미터였다고 하는데 武蔵는 身長 180센티미터에 무거운 칼을 두 個나 들고 싸웠으니 그의 體力과 迫力은 무척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芸術家としての宮本武蔵 宮本武蔵는 芸術에 造詣가 깊었던 것으로도 有名합니다. 그는 1640年 무렵 지금의 熊本県의 領主에게 招待 받아 熊本에서 살게 되는데요. 그 時期에 그린 아름다운 水墨畵나 著述, 말 안장이나 木劍 等의 工藝品이 多數 남아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武士로서 또 禅(ぜん)을 修養하면서 얻은 깨달음의 精神이 反影된 作品이겠지요.
그 中에서도 『五輪書』는 지금도 經營,스포츠 等의 指導書로서 日本뿐 아니라 世界 各地에서 사랑 받고 있습니다.
柔道のお父さん,嘉納治五郎 嘉納治五郎는 明治時代(1868~1912年)가 始作되기 直前인 1860年,지금의 兵庫県에서 태어나 10歲 때 新政府의 公務員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東京로 移徙를 합니다.
그는 元來 몸이 弱한 便이었다고 하는데요. 그것을 克服하고 精神 修養을 하기 爲해 東京大学 在學 中에 옛 武術人‘柔術(じゅじゅつ)’에 注目했고 柔術의 長点을 살리면서 理論的으로 體系化해‘柔道’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平生 柔道를 普及하 데 힘썼습니다.
그리고 1882年에는 柔道의 總 本山인 ‘講道館(こうとうかん)’을 만들어 本格的으로 ‘講道館柔道’를 傳播하기 始作했습니다. 그의 弟子들이 大會에서 좋은 成績을 거두자 嘉納治五郎는 柔道家로서 注目 받게 되었고 弟子를 길러 내는 한편, 柔道의 技術的 •理論的 基礎를 確立했습니다.
1933年에는 東京水道橋(すいどうばし)에 道場을 만들었는데요. 每年 全 世界의 柔道家 들이‘柔道의 聖地’를 보기 爲해 찾아옵니다.
嘉納治五郎の功績 많은 나라에서 ‘Judo= 講道館 柔道’로 通합니다. 이처럼 柔道가 世界的인 스포츠로 發展한 데는 嘉納治五郎의 貢獻이 큽니다. 그는 1911年에 日本體育 協會를 組織해 日本의 올림픽 留置 運動을 펼쳤으며 1912年에 開催된 스톡홀름 올림픽에 團長으로 參加해 日本 스포츠 歷史의 새장을 열었습니다. 敎育者로서 그의 業績도 무척 눈부십니다. 1894年 지금의 筑波大学(つくばだいがく)의 全身인 東京高等師範学校(とうきょうこうとうしはんがっこう)의 校長이 되어 以後 24年間 日本의 師範 敎育에 貢獻했습니다. 또 留學生을 爲한 日本語 敎育機關을 設立해 外國人에 對한 日本語 敎育에도 先驅者 役割을 했습니다.
‘人に勝つより、自分に勝て(다른 사람에게 이기기 보다 자신을 이겨라)’라는 그의 말은 武藝家로서 敎育者로서 熾烈하게 살아간 그의 삶의 姿勢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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