くれない三度笠-天童よしみ 作詞 松井由利夫 作曲. 山田年秋. 編曲. 伊戸のりお
一 義理の柵(しがらみ) 情けじゃ切れぬ 渡り鳥は なおのこと 旅のはこりで 汚れていても 袖の裏地は 緋縮緬(ひぢりめん) 泣こかい 飛ぶかい 泣くよりすっ飛べ くれない三度笠
二 野暮な渡世の 裏街道で せめて頼りの 夢灯り 風の嘘じゃ ご無事と聞いた 一目逢いたい 生みの母 泣こかい 飛ぶかい 泣くよりすっ飛べ くれない三度笠
三 恋と意気地を 一つにまこめ 結ぶ草鞋に こぼれ紅 女だてらに 一本刀 連れは野に咲く かなススキ 泣こかい 飛ぶかい 泣くよりすっ飛べ くれない三度笠
女性政治家、持統天皇と北条政子 日本의 歷史 속에서 큰 자취를 남긴 人物을 紹介합니다.
日本歷史에서 보기 드문 두 名의 女性政治家를 紹介합니다. 世紀 末의 女王 持統天皇(じとうてんのう: 645-702年)과 13世紀 初의 女性政治家, 北条政子(ほうじょうまさこ: 1157-1225年)입니다.
두 사람 모두 强力한 指導者였던 男便이 죽은 後 뛰어난 政治力으로 흔들리는 政權을 確立한 대단한 人物입니다.
藤原京を作った、持統天皇 持統天皇은 645年 제38대 天智天皇(てんじてんのう)의 딸로 태어나 13살에 三寸인 大海人皇子(おおあまのおうじ)와 結婚합니다. 지금과 달리 當時 王室에서는 執權 體制를 强化하기 爲해 近親結婚이 무척 頻繁하게 이루어졌습니다.
天智天皇은 同生이자 사위인 大海人皇子가 强力한 勢力을 가진 것을 警戒했고 이를 느낀 王子는 家族들과 함께 宮을 떠납니다. 그러나 王이 죽자 壬申の乱(じんしんのらん)’을 일으켜 王世子를 廢하고 王位에 올라 天武天皇(てんむてんのう)이 되었고 持統天皇은 王妃가 됩니다.
天武天皇은 以後 13年間 日本의 政治,宗敎,歷史의 原型을 만드는 等 많은 業績을 남겼고 686年 病으로 죽게 됩니다. 그런데 後繼者인 草壁皇子(くさかべおうじ)마저 夭折하면서 持統天皇이 第41代 王으로 卽位했습니다.
持統天皇은 天武天皇의 遺志를 받들어 律令 國家를 確立하기 爲해 努力했으며 臣下에게 文武를 奬勵하고 天武天皇 때부터 進行하던 歷史서 編纂 作業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694年,지금의 奈良県 橿原市(かしはらし)에 日本 最初의 都邑인 藤原京(ふじわらきょう)를 만들었습니다.
697年,孫子인 文武天皇(もんむてんのう)에게 讓位한 後에는 上王으로서 政治에 參與해 古代 文化가 꽃핀 奈良時代(710~784年)의 土臺를 만들었으며 律令 國家의 基本 法典이 된‘大宝律令(タイホウリツリョウ)’이 完成되는 것을 본 後 702年에 死亡해 天武天皇 陵에 合葬되었습니다.
絡繰り人形ではない真正な支配者 勿論 持統天皇이 日本 最初의 女王은 아니지만 큰 意味가 있는 理由는 7年間의 在位 期間 中 自身 의 政策을 推進했기 때문입니다.
日本에서 가장 오래된 歷史서「日本書紀(にほんしょき)」에는 天武天皇이 王妃에게 政治에 關한 助言을 求했다는 記錄이 있고 「続日本紀(ぞくにほんき)에는 讓位를 하고 上王이 된 後에도 王과 나란히 앉아 政務를 보았다는 記錄이 남아 있습니다.
「万葉集」に伝わる詩 持統天皇은 政治家이자 뛰어난 詩人이기도 했는데요 日本에서 가장 오래된 詩歌集인 「万葉集(まんようしゅう)」에 收錄된 作品 中 하나를 紹介합니다.
春過ぎて夏来るらし白妙の衣乾したり天の香具山
現代語로 飜譯하면‘いつの間にか、春が過ぎて夏がやってきたようです。あの天の香具山の麓に白い衣が干されていますよ(어느새 봄이 지나고 여름 이 온 것 같습니다. 저기 가구야마 기슭에 흰옷이 널려 있네요)’라는 意味입니다.
香具山는 藤原京 東쪽에 있는 山으로 지금은 논밭이 된 宮闕터에서 있으면 바쁜 政務 사이에 짬을 내어 詩를 즐겼던 持統天皇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듯합니다.
尼将軍北条政子 北条政子는 1157년 지금의 静岡県 伊豆半島에 該當하는 伊豆の国(いずのくに)의 地方 豪族,北条時政(ほうじょうときまさ)의 長女로 태어났습니다.
當時 首都에서는 平氏(へいし 平(たいら)姓을 가진 一族)가 權力의 頂点을 차지한 後 라이벌이었던 源氏(げんじ. 源(みなもと)姓을 가진 一族)를 討伐해 一族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源氏의 首長 源義朝(みなもとのよしとも)의 아들인 源頼朝(みなもとのよりとも)는 伊豆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監督官이었던 時政의 딸 北条政子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時政는 둘 사이를 反對해 다른 곳에 시집을 보내려 했지만 政子는 逃亡쳐 頼朝를 찾아갔고 두 사람은 함께 살다가 아이를 낳고서야 認定을 받게 됩니다.
頼朝는 家門의 怨讐를 갚기 爲해 勢力을 모아 平氏를 滅亡시켰고 幕府(ばくふ)의 實勢인 征夷大将軍(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이 되어 1192年,神奈川県(かながわけん) 鎌倉에 日本 最初의 武士 政權인 鎌倉幕府(かまくらばくふ)를 만들었습니다.
그 後 頼朝가 病으로 죽은 뒤 長男 頼家(よりいえ)가 2代 将軍이 되자 政子는 當時의 風習에 따라 佛門에 入寂해 比丘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将軍을 代身해 攝政을 펼쳐‘비구니 将軍(尼将軍)’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政子는 功臣들이 어린 将軍에게 反撥하자 将軍과 御家人(ごけにん. 将軍과 主從 關係를 맺은 武士)의 合議制를 幕府의 基本 方針으로 삼았고 이에 反對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處罰했습니다.
命を掛けた演説 1221年,3代 将軍 実朝(さねとも)가 暗殺 當한 뒤 幕府는 存續의 危機에 處합니다. 京都의 王이 武士에게 빼앗긴 實權을 되찾기 爲해 鎌倉幕府를 討伐하기로 決定했기 때문입니다.
政子는 술렁이는 武士들을 모아 놓고“頼朝 님의 은혜를 갚기 爲해 싸워라. 그리고 背信할 者는 먼저 나를 죽인 後 鎌倉를 모두 불태워야 할 것이다"라는 悲壯한 演說을 합니다. 이 말에 壓倒 當한 武士들은 朝廷의 軍隊와 끝까지 싸우기로 決意합니다.‘承久の乱(じょうきゅうのらん)’이라는 이 싸움에서 勝利한 鎌倉幕府는 以後 100余 年에 걸쳐 武士 政權을 이어나갑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또 政治家의 立場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도 武家 政權을 지키기 爲해 冷酷한 選擇을 해야만 했던 北条政子. 하지만 晩年에는 男便과 夭折한 子息들의 冥福을 벌며 지냈다고 伝해집니다.
作成者 黃圭源 | |